
* 진정한 걸작들은 예외 없이 고난을 겪는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작품이 지닌 힘을 표시한다.
언젠가 멕시코에서 부뉴엘과 내가 함께 만든 영화에 대한 평론 기사들을 모아 그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자유의 유령>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그때 막 파리에서 개봉된 직후였다. 부뉴엘은 그 기사들을 읽기 시작했다. 다음날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모든 비평이 호의적이었어. 나쁜 징조야."
더 이상 고난을 당하지 않는 부뉴엘 영화, 쾌적하고 수긍할 만한 부뉴엘 영화, 가장 평판 높은 언론조차 인정한 부뉴엘 영화! 참으로 믿을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거의 모욕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몇 주 후 뉴욕 영화제에서도 그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리고 <뉴스위크>지의 평론가가 그 영화를 씹었다. 부뉴엘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 부뉴엘의 <메꽃Bell de Jour>(우리나라에서는 <세브린느>로 개봉되었다-- 옮긴이)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설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현실과 환상의 중간에 서 있다. 여기에서 여주인공 세브린느의 갈등이 갑자기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 우리가 도달한 그 지점은 스토리의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가? 부뉴엘도, 나도, 그리고 배우들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설명도 결국은 건방진 헛소리에 불과하며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 그 씬은 매우 치열한 고민 끝에의 어느 날 밤 부뉴엘의 꿈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씬은 촬영하는 동안에 부뉴엘 자신을 감동하게 만들었고, 나중에 그것을 설명할 때도 부뉴엘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았다. 부뉴엘은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자네에게 진정한 미스터리를 경험할 행운이 찾아온다면 말이지, 자넨 그것을 존중해야만 하네. 미스터리를 분해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 규정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더구나 부뉴엘은 자신의 모든 영화에 몇 가지씩 가짜 정보를 끼워 넣기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지리나 역사 수업 시간에 슬쩍 엉뚱한 거짓말을 집어넣듯이 말이다. 진짜 현실이란 부뉴엘에게 있어 꽉 조인 코르셋처럼 지겨운 것이었다.
* 부뉴엘은 펠리니의 작품에 사용된 특수 효과들을 좋아했지만, 자기 영화에서는 절대로 그런 효과들을 쓰지 않았다......... 부뉴엘은 잘 짜여진 명암 대비, 적당한 시간에 삐걱거리는 문소리, 서서히 흐려지는 화면, 슬로 모션들을 통해 풍겨 나오는 미스터리를 원치 않았다. 그는 모든 촬영 효과를 철저히 불신했으며, 그것을 안이하고 인위적인 것이라 해서 거부했다. 그는 애매 모호한 것보다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 좀더 미묘한 그 무엇인가를 위해 테크닉을 억제하려는 신중함, 의도적으로 효과를 회피하는 것, 끝없이 유혹해 대는 아름다움에 대한 불신, 이런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게 느껴진다......... 기교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있는 그대로만 보여줘도 충분하다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 부뉴엘은 가끔 영화란 성당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들의 이름이 크레딧에서 지워져야 하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순수한, 이름 없는 릴 몇 개만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당을 지은 사람들, 또는 건축가의 이름도 모르는 채 성당에 들어가듯이 영화를 보게 될 터였다.
* 나는 19년에 걸쳐 그와 함께 일했다.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개방적이고 거의 순진한 외모, 그리고 그의 진보 성향에도 불구하고-- 처음이자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우선 그 자체가 수수께끼였다. 그는 평생 동안 심리학을("자의적이고, 쓸데없고, 억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는 문제가 되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 <영화, 그 비밀의 언어>(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조병준 옮김, 지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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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인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쓴 책이다. 그는 <양철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프라하의 봄)>, <시라노 백작>, <세브린느 Bell de jour>, <브루주아의 은밀한 욕망>, <욕망의 모호한 대상> 등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나리오 작가라고 한다. 우리는 영화를 감독의 작품, 또는 주연 배우의 대표작으로만 기억하지, 그것을 시나리오 작가의 작품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탓에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이 책에서 그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시나리오의 '슬픈, 그러나 자연스러운' 운명이라고. "일단 영화가 존재하기 시작하면, 시나리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시나리오 작가의 체험과 시선으로 보는 영화의 세계, 그 속에서 루이스 부뉴엘이라는 한 예술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었다. 카리에르는 20년 가까이 부뉴엘과 같이 영화 작업을 해왔다.
이 책 속에 소개된 부뉴엘 감독의 몇몇 일화와 면모는 무척 인상적이다.
부르주아의 성적 판타지와 위선적 만찬을 독특하게 영상화한 루이스 부뉴엘. 그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자기만의 환상적인 어법으로 그려냈다.

부뉴엘은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신문, 그리고 꿈. 그것이 그들이 했던 작업의 전부였다"고 카리에르는 표현한다. 그 작업을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근육이 '상상력'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상상력이라는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매일 규칙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의 231쪽에는 자수를 놓고 있는 부뉴엘의 사진이 실려 있다. "상상하기 위한 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신성한 순간이었다"는 캡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