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방법에 기댈 때 나는 내용에 기댄다. 내용이라니!

아직도 거쳐가야 할 여분의 굴곡이 있는가? 방법을 곧 규범의 현실이라고 바꾸어 놓아도 나는 끝내 그 틀에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어쩌지 못하는 내향성이 끝없이 나를 안으로 움츠리게 한다.

진액이 다 빠져나간 술지게미의 일상을 나는 살고 있지만, 한 지친 모험이 무릅쓰고 가려고 하는 미지가 어디엔가 꼭 있을 것만 같다.

저버리지 않는 믿음의 눈물겨움에 실려 나는 지금 풍경의 풍파 위에 이렇게 떠 흔들린다.

 

-- 김명인 시집 <길의 침묵>(문학과지성 시인선)  뒷표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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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sta 2004-09-1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이 그림 무슨 그림인가요..??

에레혼 2004-09-15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보고 좋아서 제 그림 창고에 모셔다 놓은 건데.... 저도 작가와 제목은 잘 모르겠네요.
이미지가 글에 어울리는 듯해서 끌어다 놨어요... 타스타님.
 

 

우리에게는 고통을 피하려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이란 원죄가 있다. 이 원죄는 언제나 존재하는 엔트로피의 힘으로 우리를 수렁 속으로 퇴행시킨다.

에너지는 보다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고차적 분화의 상태에서 덜 분화된 상태로 나아간다. 그래서 아래로 아래로 흘러서 마침내 완전 해체되어 미분화의 상태인 엔트로피 상태가 된다.

이 엔트로피의 힘을 이겨내는 정신적 영적 성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고 젊은 시절의 낡은 지도에 집착하여 그 옛날 방식대로 일을 하고 쉬운 길을 택하려 한다. 영적 성장을 이루려면 이것을 이겨내고 보다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해야 한다. 머리 속에 에전에 녹음된 테이프를 새 테이프로 바꾸어 끼워야 한다. 새로운 정보로 지도를 개편하고 새로운 관계로 존재를 확장하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성장하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사랑이다.

-- M. 스캇 펙, <창가의 침대>, 이상호 옮김, 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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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을 피하려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이란 원죄......

나는 재능도 없고, 독해질 이유도 없어, 라고 말하면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게으름

"재능이 없는 것을 알고도 더 가야 할까"라는 말을 할 만큼 열심을 다해 걸어오지 않았으므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는 지적은 타당하고도 적절하다.

엄살을 피우며, 슬픈 미소를 지우며  상처와 좌절에 예방주사를 놓으려는 태도는  조금도 우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아래로 아래로 흘러서 마침내 완전 해체되어 미분화의 상태인 엔트로피 상태로 가는 길, 이건 단맛과 선명하고 조잡한 빛깔로 유혹하는 불량 식품 같은 함정일 것이다, 한 발 슬쩍 밀어넣고 빠져들어 가고 싶은....... 그러면 안온하고 나른하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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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섬뜩하고도 유머러스한 그림.
저는 가끔 머리통을 저렇게 뚝 떼어 속을 솔로 좀 박박 문질러
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없는 이 안 2004-09-1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 그림을 머리 아랫부분이 안온하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거라고 봐야 하나요, 아님 재능없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머리만이라도 위로 위로 끌어올리는 거라고 봐야 하나요... ^^ 이 그림 맘에 들어요. 머리라는 게 가끔 이렇게 분리 가능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히힛. 그림 설명도 해주시지... ^^

2004-09-1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꼭 누구 그림인지가 궁금하답니다..저도 종종 머리를 떼어내 도대체 정말 내 머릿 속은 똥이 얼마나 차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흑. 스캇펙 책은 남김 없이 다 읽었어요..(이런 멘트가 쓰고 싶습니다.^^&&) 창가의 침대라...창가의 침대에서 게으르게 책장을 넘기고 싶군요!

에레혼 2004-09-19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흙흙
저도 이 그림의 작가와 제목을 모른답니다
저렇게 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잦은지..... 다들 공감하는 그림인데......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캡션을 달아놓을게요
 

 

 

 

 

 

 

 


* 진정한 걸작들은 예외 없이 고난을 겪는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작품이 지닌 힘을 표시한다.
언젠가 멕시코에서 부뉴엘과 내가 함께 만든 영화에 대한 평론 기사들을 모아 그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자유의 유령>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그때 막 파리에서 개봉된 직후였다. 부뉴엘은 그 기사들을 읽기 시작했다. 다음날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모든 비평이 호의적이었어. 나쁜 징조야."
더 이상 고난을 당하지 않는 부뉴엘 영화, 쾌적하고 수긍할 만한 부뉴엘 영화, 가장 평판 높은 언론조차 인정한 부뉴엘 영화! 참으로 믿을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거의 모욕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몇 주 후 뉴욕 영화제에서도 그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리고 <뉴스위크>지의 평론가가 그 영화를 씹었다. 부뉴엘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 부뉴엘의 <메꽃Bell de Jour>(우리나라에서는 <세브린느>로 개봉되었다-- 옮긴이)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설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현실과 환상의 중간에 서 있다. 여기에서 여주인공 세브린느의 갈등이 갑자기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 우리가 도달한 그 지점은 스토리의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가? 부뉴엘도, 나도, 그리고 배우들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설명도 결국은 건방진 헛소리에 불과하며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 그 씬은 매우 치열한 고민 끝에의 어느 날 밤 부뉴엘의 꿈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씬은 촬영하는 동안에 부뉴엘 자신을 감동하게 만들었고, 나중에 그것을 설명할 때도 부뉴엘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았다. 부뉴엘은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자네에게 진정한 미스터리를 경험할 행운이 찾아온다면 말이지, 자넨 그것을 존중해야만 하네. 미스터리를 분해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 규정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더구나 부뉴엘은 자신의 모든 영화에 몇 가지씩 가짜 정보를 끼워 넣기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지리나 역사 수업 시간에 슬쩍 엉뚱한 거짓말을 집어넣듯이 말이다. 진짜 현실이란 부뉴엘에게 있어 꽉 조인 코르셋처럼 지겨운 것이었다.


* 부뉴엘은 펠리니의 작품에 사용된 특수 효과들을 좋아했지만, 자기 영화에서는 절대로 그런 효과들을 쓰지 않았다......... 부뉴엘은 잘 짜여진 명암 대비, 적당한 시간에 삐걱거리는 문소리, 서서히 흐려지는 화면, 슬로 모션들을 통해 풍겨 나오는 미스터리를 원치 않았다. 그는 모든 촬영 효과를 철저히 불신했으며, 그것을 안이하고 인위적인 것이라 해서 거부했다. 그는 애매 모호한 것보다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 좀더 미묘한 그 무엇인가를 위해 테크닉을 억제하려는 신중함, 의도적으로 효과를 회피하는 것, 끝없이 유혹해 대는 아름다움에 대한 불신, 이런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게 느껴진다......... 기교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있는 그대로만 보여줘도 충분하다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 부뉴엘은 가끔 영화란 성당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들의 이름이 크레딧에서 지워져야 하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순수한, 이름 없는 릴 몇 개만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당을 지은 사람들, 또는 건축가의 이름도 모르는 채 성당에 들어가듯이 영화를 보게 될 터였다.


* 나는 19년에 걸쳐 그와 함께 일했다.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개방적이고 거의 순진한 외모, 그리고 그의 진보 성향에도 불구하고-- 처음이자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우선 그 자체가 수수께끼였다. 그는 평생 동안 심리학을("자의적이고, 쓸데없고, 억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는 문제가 되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 <영화, 그 비밀의 언어>(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조병준 옮김, 지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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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인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쓴 책이다. 그는 <양철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프라하의 봄)>, <시라노 백작>, <세브린느 Bell de jour>, <브루주아의 은밀한 욕망>, <욕망의 모호한 대상> 등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나리오 작가라고 한다. 우리는 영화를 감독의 작품, 또는 주연 배우의 대표작으로만 기억하지, 그것을 시나리오 작가의 작품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탓에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이 책에서 그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시나리오의 '슬픈, 그러나 자연스러운' 운명이라고. "일단 영화가 존재하기 시작하면, 시나리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시나리오 작가의 체험과 시선으로 보는 영화의 세계, 그 속에서 루이스 부뉴엘이라는 한 예술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었다. 카리에르는 20년 가까이 부뉴엘과 같이 영화 작업을 해왔다.


이 책 속에 소개된 부뉴엘 감독의 몇몇 일화와 면모는 무척 인상적이다.
부르주아의 성적 판타지와 위선적 만찬을 독특하게 영상화한 루이스 부뉴엘. 그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자기만의 환상적인 어법으로 그려냈다. 



부뉴엘은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신문, 그리고 꿈. 그것이 그들이 했던 작업의 전부였다"고 카리에르는 표현한다. 그 작업을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근육이 '상상력'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상상력이라는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매일 규칙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의 231쪽에는 자수를 놓고 있는 부뉴엘의 사진이 실려 있다. "상상하기 위한 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신성한 순간이었다"는 캡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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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09-16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뉴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코아아트홀에서 봤어요.
모든 가학을 견뎌내고 한 여자의 처녀를 차지하려던 가엾은 남자들이 기억에 남네요.
홍상수의 오 수정 이랑 좀 비슷하지요...

에레혼 2004-09-1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욕망...>은 오래 전에 봐서 가물가물...... 최근에 <세브린느>를 보았지요.
스페인 사람들의 피 속에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들끓는 열정과 어둠 저 너머를 응시하는 고양이처럼 날랜 감성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플레져님의 이미지를 볼 때마다 플라멩고 댄스의 엑스터시가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내 생각이 잠시 딴데로 갔던 걸까,

아니면 네가 노래를 멈췄었니?

뻐꾸기야

-- 사이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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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말을 글로 옮겨야 할 때 무척 망설였지요.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도 글로 나타내니까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책으로 남겨 다시 그걸 되읽어 보면

그땐 그 뜻을 알겠더라구요."

 

-- 마르그리트 뒤라스, <얀 앙드레아 슈타이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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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09-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에서 뒤라스의 <연인>을 구했어요. 영화는 봤는데, 뒤라스의 글은 읽지 못했거든요.
저도 가끔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땐 글로 써봐요.
어줍잖은 그래프도 그려가면서...ㅎㅎ
이미지 컷이 좋은데요.

에레혼 2004-09-12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라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뒤라스의 소설이 생각보다 많이 번역된 편인데, 지금은 거개가 절판 상태라서..... 저는 헌책방을 통해 열 권 남짓 구해서 읽었지요.
독특하고 마력적으로 글을 써 나가는 작가예요, 뚜렷한 줄거리는 없는데 그 속의 인물은 진한 안개처럼 잊을 수 없게 각인시키는 솜씨......

오늘 제 마음에 위안과 격려를 주고 싶어서, 찾아 낸 구절이지요.
플레져님은 이미 그 비법을 터득하고 계시군요!

로드무비 2004-09-1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신문사에서 나온 뒤라스 다시 읽고 싶어요.
그때 사놓을걸. 흑흑.
라일락와인님은 가지고 계시겠네요? 부러워라!

에레혼 2004-09-1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지고 있어요.....
원하시면 빌려 드릴게요, 로드무비님!
저도 아끼는 책이라 그냥 시집 보내지는 못하겠구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라고 할게요
군데군데 밑줄을 많이 그어놔서 읽기에 방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생각 있으시면 주소 알려주세요!

hanicare 2004-09-1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다 혹은 내 몸은 내 마음보다 정교하단 생각을 가끔 합니다.

에레혼 2004-09-1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런 순간들이 있지요, 그걸 몸으로 알기보다 먼저 느끼는 순간이요
문제는 그때 내가 나를 믿고 그 순간에 온전히 자신을 실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세월이 흐를수록 확실히 가진 거라곤 늘어난 나이뿐인데... 무얼 겁내고 두려워해서 그런 순간들을 그저 흘려 보내게 되는지......
그저 한번 나를 실어 봤으면, 번지점프를 뛰어내리듯이!

로드무비 2004-09-1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기쁜 소식을......
라일락와인님, 저 좀 빌려주세요.
깨끗이 읽고 반납할게요.^^

에레혼 2004-09-1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모닝 커피 한잔 하셨나영?
살짝 주소 남겨 주세요, 연서를 보내드리지요.

2004-09-16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