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쓰는 것이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나는 너무나 심각한 비관주의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만약에 내게 무언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니고, 내가 더없이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며, 내가 해야만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작은 변명-- 모기 흐느끼는 소리만한 작은 변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아쉬워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모의 시인.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것이다."

--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문학과지성 시인선) 뒷표지의 말 중에서

 


 

 

 

 

 

*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을 수 있는 경지'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유전자를 타고나야 가능한 것 아닐까. 누구나 그렇게 하자고 작정한다고, 또는 오랜 시간 수련이나 행공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닌 듯싶다.

* 구원과 희망을 아직 믿고 있는가...... 하지만, 꼭 그런 이름이 아니라 해도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야 또 어찌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 역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방도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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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9-2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달을 사는 것, 파는 것은 어쩜 희망을 사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더이다. 희망,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가지가 아닌가 싶네요...

에레혼 2004-09-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달을 사고 파는 것... 그런 풍습이 있나요?
희망, 순진하게 삼킬 수도, 그렇다고 뱉어낼 수도 없는... 삶의 묘약이자 굴레가 아닐까요

근데, 물만두님은 요즘 정말 바지런하게 이미지 변신을 하시는군요!

hanicare 2004-09-2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다.'음. 저역시 이 귀절이 탁 날아와 꽂히는군요. 한 통의 물. 김종삼시인의 시나 그걸 꾸어온 나희덕시인의 산문집제목을 보면 두 분 모두 구체적이지 않은 몽롱한 문자를 가지고 놀았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나봐요.

에레혼 2004-09-2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역시..... 저도 그 구절이 탁 꽂히더라구요, 양궁에서의 골든 샷처럼, 심장 한가운데 명중! 몸으로 온전히 살지 않고, 엄살과 치장과 자기 위안에 적당히 기대서 사는 제 꼬라지 때문에 늘 부채감과 죄책감이 따라다녀요.

언뜻 보고 처음엔 이미지를 바꾸셨구나 했더니, 이름까지! 심상에 무슨 변화가? 좋은 변화겠지요?


hanicare 2004-09-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hanicare란 워낙에 라이프파트너 김모씨의 닉네임이어서 어째 남의 속옷을 걸친 듯 거북했지요.그래서 제가 전에 종종 쓰던 아이디로 바꿨답니다. 그리고, 좀 알록달록해지고 싶어서요^^ 제가 아동스러운 것도 남몰래 좋아한답니다.(아직도 몰래 어린 시절의 동화를 거푸 읽곤 하지요.)

2004-09-20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괴로움의 실체는 놀고 먹지 못해서 라고 생각하곤 했는데..마음에 와 닿는 글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4-09-2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깁슨이로군요. 종전까지 제 방 이미지로 썼더랬는데, 바꾼 것보다 이전 것이 좋다고들 해서 다시 쓸까 어쩔까 생각 중이었는데, 예서 보게 되다니요.

에레혼 2004-09-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그 대목에서 걸려넘어지는군요, 참나님...

마녀물고기님, 찾아와 주셨네요
그러셨나요? 저런 '유령' 같은 사진을 방의 이미지로 쓰다니... 역시 마녀물고기님답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