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쓰는 것이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나는 너무나 심각한 비관주의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만약에 내게 무언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니고, 내가 더없이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며, 내가 해야만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작은 변명-- 모기 흐느끼는 소리만한 작은 변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아쉬워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모의 시인.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것이다."
--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문학과지성 시인선) 뒷표지의 말 중에서

*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을 수 있는 경지'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유전자를 타고나야 가능한 것 아닐까. 누구나 그렇게 하자고 작정한다고, 또는 오랜 시간 수련이나 행공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닌 듯싶다.
* 구원과 희망을 아직 믿고 있는가...... 하지만, 꼭 그런 이름이 아니라 해도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야 또 어찌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 역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방도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