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청소를 하다가, 문득, 그냥, 불현듯, 오래 걸어 온 끝에 밀려드는 갈증처럼, 영화를 보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디오도,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더빙된 영화도 아닌 '고전적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 무엇이 목말랐던 것인지, 무엇이 그리웠던 것인지.......

알렉산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1그램>을 보았다. 극장 안에는 나를 빼고 한 쌍의 젊은 연인이 있을 뿐이었다.

<아모레스 페로스>의 그 강렬하고 지독한 운명적 우연과 인연의 교차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21그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첫 장면이 시작될 때  아, 숀펜이 나오네... 했을 정도로. 난 외우기 어려운 이름의 이 감독의 진지하고 엄숙한 질문법이, 실수로 뒤엎은 직소 퍼즐처럼 시간의 조각들을 한데 뒤섞어 제멋대로 배열해 놓는 그의 스타일이, 흐릿하고 탁한 모래알을 뿌려놓은 듯한 거친 화면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의 방식이 좋았다. 요즘 유행하는 유머와 따뜻한 가벼움을 외면할 수 있는, 그의 뜨거운 묵직함이.

영화를 보고 나와 친구의 서점에서 책을 한 권 골랐다.  나카무라 유지로와 우에노 치즈코의 왕복 서간집<인간을 넘어서-- 늙음과 젊음, 남과 여>. 우연히, 세상의 인상적인 만남의 순간이 알 수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그저 우연히 이 책의 차례를 보고 마음이 확 쏠렸다.  아라비아해의 석양, 늙음의 섹슈얼리티, 어린아이의 시간, 다극화하는 자아, Never say "Next time"....... 이 책의 부제인 늙음과 젊음, 남과 여의 문제는 언제나 그래 왔고, 특히 이즈음 내가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주제이다.

친구를 보면서, 나는 나의 '나이듦'을 실감한다. 그의 피로한 얼굴, 물기 빠져 버린, 되풀이된 세탁으로 적당히 탈색돼 버린 듯한 표정, 열정이 채 증발하지 않은 그 위에 심드렁함을 걸치고 있는 몸의 언어, 그리고 간간이 별뜻없이 찾아드는 가벼운 침묵. 그 공기. 그리고 지는 시월의 석양. 이렇게 우리의 2004년 시월이, 또 한 번의, 그러나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을 이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알라딘의 적립금으로 주문한 디브이디 타이틀 두 개를 저녁 무렵 받았다. 쟈크 리베트의 <알게 될 거야>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지난번에 주문했던 오즈의 <가을 햇살>과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은 품절이라고 나중에 연락이 왔었다. 이번엔 내가 원하던 것들이 무사히 나에게까지 당도했다. 늘 원하던 것을 무사히, 그리고 쉽게 얻게 되는 건 아니다.

 

...................

갑자기 모든 것이 하나의 상징으로, 하나의 맥락을 가진 숨겨진 의미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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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22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21그램 볼 생각입니다. 최근 기대되는 영화 중 하나네요.

에레혼 2004-10-2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저는 좋았어요. 전작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터라, 이 감독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몇 해 전 우연히 보았던 <아모레스 페로스>는 그 뒤 비디오로도, 디브이디로도 구할 수가 없어요, 소장하고 싶은데......

님, 이 영화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게 더 좋으리란 생각입니다.

2004-10-2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2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님, 그런 계기로도 우리는 만나게 되곤 해요, 이름, 목소리, 어떤 말 한마디에 이끌려서......
들러주셔서 반갑구요, 물론 여기 있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 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