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어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앨범을 빌려갔다. 때는 겨울이고 날도 시리니 라흐마니노프와 잘 어울리는 시간인 듯하다. 친구에게 곡에 대한 설명과 연주자의 특색에 대한 첨언을 해준 뒤 나또한 그의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오늘 자정 즈음, 나는 그의 교향곡 2번을 들었다. 순서대로 듣지 않고 각별히 생각나는 3악장을 먼저 들었다. 3악장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불처럼 나를 따스히 덮어줬다.
이 곡은 1906년 가을과 1907년 봄 사이에 만들어졌다. 즉 겨울에 만들어진 것이다. 눈이 눈부시게 흩날릴 때 그는 따스한 선율을 만들었다. 그답다. 겨울이기에 특별히 제 몸을 웅크리고선 만들었을 테다. 제 몸과 몸의 부딪힘으로 자신을 눅이며 머릿속 선율을 오롯이 오선지에 그려 냈을 것이다. 어차피 교향곡 1번의 실패의 참담함은 피아노 협주곡 2번 덕에 적절히 보상 받은 그였다. 어느 때보다 살갑고 정겨운 겨울이었을 테다.
1악장은 Largo다. E단조 소나타 형식이다. 도입부는 여러 개의 동기로 구성되었으며 주요부에서는 제 1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제시된다. 제 2주제는 G장조로 목관과 현이 제시한다. 발전부는 제 1주제가 잉글리시 호른으로 등장하고 재현부는 2주제가 연주된 뒤, 도입부의 제 1바이올린 동기가 코다 주제로 사용된다.
2악장은 Allegro molto다. A단조의 스케르초 형식이다. 주제는 호른으로 제시된 후 현으로 이어진다. 중간부에서는 대위법적인 선율이 진행된다.
3악장은 Adagio다. 가장 선율이 매혹적인 부분이다. A장조이며 제 1바이올린으로 선율이 시작되며 클라리넷으로 연결된다. 이후 1악장의 제 1바이올린 동기가 나타나고 오보에로 이어지며 따스하면서 애절한 음이 미끄러지듯 울린다.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다. 참고로 3악장의 주요 선율은 김연아가 나오던 ‘위스퍼’ 광고에도 삽입됐다. 빙상 위 그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주는 음악이었다. 단 3초 정도 나왔지만 그녀와 그의 음악은 그렇듯 빛났다.
4악장은 Allegro vivace로 E장조다. 포르티시모를 시작으로 제 1주제가 이어진다. 제 2주제는 D장조로 현악기가 제시한다. 코다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고클에 있는 게시판의 설명을 참조했다. 음악을 그들만의 용어로 풀어내니 삿된 말보다 울림이 적은 듯하다. 너무 많은 말도 사치겠지만 적절히 음악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섬세한 말이 더 나은 듯 보인다.
라흐마니노프는 신경 쇠약을 앓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는 연약함이 느껴진다. 신경 쇠약을 앓았다는 사실 때문에 연약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연약함을 느끼고선 그의 신경쇠약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한 이해는 그의 음악으로 명징해진다. 수많은 음들이 1악장에선 주로 충돌하듯 부서진다. 광폭하고 거침없다. 허나 2악장, 혹은 3악장에선 종종 그 광폭함이 부러 행했던 ‘위악(僞惡)’ 이런 걸 음으로 증명한다. 사실 나는 섬세하고 연약하니 본인을 괴롭히지 말라며 구걸하듯 애원한다. 라흐마니노프가 들려주는 멜랑콜리하며 얼음장처럼 잔약한 선율의 향연에는 이러한 자기 고백이 있다. 아름답지만 마음껏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수 없는 그 애절한 선율엔 이런 그의 뒷모습이 있다.
슈만에겐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광기가 있었고 라흐마니노프에겐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이 있었다. 둘의 음악에서 제어할 수 없는 격정이나 분노를 느꼈다면 그건 그들의 자기고백이 성공적이란 방증이다. 물론 차이코프스키에게서도 깊은 슬픔과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애타는 외침을 들을 수 있다. 허나 그의 죽음은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시쁜 눈을 이기지 못한 자살이었다. 슈만이나 라흐마니노프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세속적 성공을 바라며 섬세한 사람이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였다. 제 목숨을 스스로 앗는 일 따윈 생각지 않을 만큼 생의 의지가 그득했기에 신경쇠약은 역설적으로 그를 옮아 맸다. 힘들다며 이해해달라는 고백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엔 담겨있다.
고흐는 그림으로 보들레르는 시로 세상과의 불화를 증명했듯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으로 제 약함을 드러내고 세상과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 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은 겨울에 알맞다. 몸을 부비고 살갗을 데워 줄 이가 없는 외로운 영혼에겐 그 애절한 외침이 마음을 다습게 해줄 테다. 가을이 브람스의 것이라면 겨울은 라흐마니노프의 것이다. 내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