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2 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박찬옥 감독, 서우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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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둘에 봤던 그녀의 영화는 그냥 그랬다. 단편 소설을 보는 듯하여 적당히 지겨웠다. 다만 시간을 들인 값은 한 영화 정도였다. 작년 여름, 티비에서 그녀의 영화를 다시 봤다. 놀라웠다. 대사나 장면의 분위기가 일찍이 내가 지향하던 모습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삶과 되새김이 영화를 겹으로 보게 한 덕이다. 박해일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듯하여 멈칫하기도 했다. 조금은 비겁하고 다소 삶이 버거운 그의 모습이 가여우면서 안타까웠다. 박해일의 선하고 유약한 눈빛이 가장 빛났던 영화였던 듯하다. 기형도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질투는 나의 힘’ 말이다.

파주를 봤다. 6년 전의 작품보다 더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하려 애쓴다. 전작은 나약한 지식인이 기성세대의 힘을 동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파주에선 사랑이란 단어로 규정짓기 힘든 절절함과 애틋함이 드러난다. 언론에서 말하듯 불륜이란 카테고리로 묶기에는 그 언어가 헐겁다. 그저 사랑이란 다습고 너른 품새를 보여주는 언어만이 영화 속 인물들과 짝지을 수 있겠다. 결국 이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기보다는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래서 혼동스럽고 서사를 따라잡기 쉽지 않다.

각자는 깊은 슬픔을 안은 눈빛을 한다. 장률 감독의 ‘이리’에서처럼 그 슬픔은 지극히 온당하지만 감당해내기 버겁다. 그저 그들이 슬퍼 보이기에 슬픈 무안함 때문이다. 왜 슬픈지는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이유는 공감을 하기 위해서이고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의 눈으로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관객으로선 그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서사보다 미세한 장면에 마음을 쏟게 한다. 헐거운 서사 덕에 영화를 가슴에 아로새기기 힘든 탓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심상하다. 일상처럼 내지르고 버릇처럼 미소 짓는다. 자연광을 쓴 듯한 장면의 밝음이 씁쓸한 각자의 삶을 더 외롭게 한다. 그 눈부심이 지나쳐, 빛보단 그림자에 눈이 간다. 햇살이 따스하기 보단 인물들을 방기하는 인상마저 준다. 용산 참사를 되새기게 하는 재건축 현장 또한 정치적이라기 보단 일상적이다. 이야기를 잘 녹여낸 감독 덕이다.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어 영화 시장에서 축출되었던 이경영의 등장 신 경우 여러 해석을 낳게 한다. 대사는 없고 눈빛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뛰어난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규정짓는 콘텍스트들의 미묘함 덕이다. 그 불편함이 영화를 읽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너무 불친절하다. 서사는 미친년 널뛰듯 왔다 갔다 하고 인물의 감정선을 헤아리기엔 삶의 포개짐이 얇다. 발신 번호 서비스가 생기기 전인 시기에, 부재중 전화에 응답하는 이선균의 모습은 의아하다. 주어진 인물들의 삶도 잠시 훑고 지나갈 뿐이다. 주어진 콘텍스트가 미진하니 텍스트를 읽기에 버겁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릴만 하다.

영화는 ‘이리’와도 닮았고 ‘초록 물고기’와도 닮았다. 물론 이러한 몇 개의 교집합이 그녀를 작가주의 감독으로 추어올리는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관객의 능동성을 이끌어내는 화면의 깊이와 불친절함이 그녀의 이름을 드높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기도 힘겨운 세상에 그것을 반추하란 말은 지식인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수한 오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오만은 감내해 줄 법하다. 하물며 근사한 풍경과 투박함을 가장한 세련됨으로 말을 붙이는 박찬옥이기에, 마음을 기울일만하다. 나 또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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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날 아침인데 무료하다. 아침부터 시디 플레이어는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직 거렸다. 간만에 음반을 새로 샀는데 심히 언짢았다. 학교에 일찍 가면 무료로 나눠주던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도 오늘은 없다. 다들 바쁜가 보다. 싸이엔 생일 축하한다는 글 하나가 있고 자정엔 생일 축하 한단 문자가 하나 왔다. 절실히 아끼는 지인들이라 그 정겨움이 고맙다.

 

 

 모레 면접이 있어 오늘 술자리를 갖기도 좀 그렇다. 그렇다고 책과 신문만 보자니 그 적적함이 그닥 옳아 보이진 않는다. 일상에 매진할 따름이다. 글라주노프의 음악을 듣다 시디가 멈추는 탓에 근사한 아침이 뭉개졌다. 28번 째 생일은 조용히 보내야겠다. 간헐적으로 고장나는 시디 플레이어 때문에 핍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다. 좀 더 푼푼히 살고자했거늘 이런 사소한 틀어짐에도 나는 휘청된다. 세월과 단단함은 정비례하는 줄 알았거늘 딱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 미욱함이 가엾지만 자기 연민만은 하지 않으련다. 비루한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선 그리해야 한다. 해피 버스데이 투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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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1-18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다니!
생일 축하드려요^^

바밤바 2010-01-18 08:30   좋아요 0 | URL
감사 합니다^^ㅎㅎ 일찍 일어났다기엔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닌듯 하네요~
하하하하하하!ㅎ

무해한모리군 2010-01-18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축하해요.
올해 좋은 일이 당신한테 많이많이 일어났으면 해요~
딱 맞는 일자리도 떨어져라 하늘에서!

바밤바 2010-01-18 08:3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누나~ ㅋ
낼 모레 최종 면접이니까 잘 되면 누나에게 맥주를 쏠게요~! 숑숑!!ㅎ

무해한모리군 2010-01-18 08:59   좋아요 0 | URL
낼 모레 어디서 면접봐요?
제가 있는데 근처면 제가 맛난거 사줄게요 ^^

2010-01-18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1-18 12:02   좋아요 0 | URL
낼 모레 충무로에서 면접 보기에 누나랑 보기 힘들 듯^^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ㅎ

hnine 2010-01-1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남편과 생일이 같으시네요.
잘 하지 못하는 솜씨로 국과 밥으로 아침상 차려서 먹고 출근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초라한 생일상인 것 같아 오늘 저녁은 뭘 차릴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월과 단단함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오히려 더 물러지는 것 같은데요. 단단함과 무름의 차이가 큰게 아니구나 알아간다고나 할까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따슨 밥 드시고요, 조용하지만 꽉찬 하루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바밤바 2010-01-18 08: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바람결님 블로그에서 자주 뵜었는데 제 블로그도 찾아주셔서 감사~^^
요 며칠 간 자주 놀아서 오늘은 적적하지만 꽉찬 하루가 될 것 같네요~
부군께도 생일 축하 한다고 전해주세요~ㅎ

비로그인 2010-01-18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생일 축하!!
면접도 좋은 결과 있으시길 빕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따스한 곳인 듯욥~~

바밤바 2010-01-18 08:3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오늘 날이 풀려서 한결 더 따스해진듯~ㅎ
밥벌이하게 되더라도 음악은 열심히 들어야 겠어요~
바람결님 같은 감성을 가지려면 말이죠~^^

Mephistopheles 2010-01-1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축하드려요 바밤바님.가까이 계시면 바이올린이라도 켜드리는 건데..
(구타본능을 유발할껍니다.)

바밤바 2010-01-18 12:02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전 비폭력주의자라서 사람 안때립니다~
메피님의 바이올린 듣고 싶네요~ 후훗~

Mephistopheles 2010-01-18 12:18   좋아요 0 | URL
연주가 아닙니다..켠다..라는데 의미를 두시면 구타본능 충분히 유발됩니다.
(연주는 아무나 못하지만 켜는 건 아무나 하잖아요..ㅋㅋ)

바밤바 2010-01-18 20:00   좋아요 0 | URL
역시 언어유희의 제왕이시네요~ ㅎㅎ
메피 님 어떤 분이지 궁금해요. 왠지 포스가 남다르실 듯~ ㅎ

Forgettable. 2010-01-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밤바님, 생일 축하해요!!
면접도 잘 보시구요. 최종이라니 ㄷㄷ 떨지말고 화이팅! ^^

바밤바 2010-01-18 19:59   좋아요 0 | URL
화이팅! 뽀님도 화이팅! 아자아자! ㅋ
 

 

 친구가 어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앨범을 빌려갔다. 때는 겨울이고 날도 시리니 라흐마니노프와 잘 어울리는 시간인 듯하다. 친구에게 곡에 대한 설명과 연주자의 특색에 대한 첨언을 해준 뒤 나또한 그의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오늘 자정 즈음, 나는 그의 교향곡 2번을 들었다. 순서대로 듣지 않고 각별히 생각나는 3악장을 먼저 들었다. 3악장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불처럼 나를 따스히 덮어줬다.   

 

 

  

 

 

 

 

  

 이 곡은 1906년 가을과 1907년 봄 사이에 만들어졌다. 즉 겨울에 만들어진 것이다. 눈이 눈부시게 흩날릴 때 그는 따스한 선율을 만들었다. 그답다. 겨울이기에 특별히 제 몸을 웅크리고선 만들었을 테다. 제 몸과 몸의 부딪힘으로 자신을 눅이며 머릿속 선율을 오롯이 오선지에 그려 냈을 것이다. 어차피 교향곡 1번의 실패의 참담함은 피아노 협주곡 2번 덕에 적절히 보상 받은 그였다. 어느 때보다 살갑고 정겨운 겨울이었을 테다.   

 1악장은 Largo다. E단조 소나타 형식이다. 도입부는 여러 개의 동기로 구성되었으며 주요부에서는 제 1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제시된다. 제 2주제는 G장조로 목관과 현이 제시한다. 발전부는 제 1주제가 잉글리시 호른으로 등장하고 재현부는 2주제가 연주된 뒤, 도입부의 제 1바이올린 동기가 코다 주제로 사용된다.

 2악장은 Allegro molto다. A단조의 스케르초 형식이다. 주제는 호른으로 제시된 후 현으로 이어진다. 중간부에서는 대위법적인 선율이 진행된다.

 3악장은 Adagio다. 가장 선율이 매혹적인 부분이다. A장조이며 제 1바이올린으로 선율이 시작되며 클라리넷으로 연결된다. 이후 1악장의 제 1바이올린 동기가 나타나고 오보에로 이어지며 따스하면서 애절한 음이 미끄러지듯 울린다.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다. 참고로 3악장의 주요 선율은 김연아가 나오던 ‘위스퍼’ 광고에도 삽입됐다. 빙상 위 그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주는 음악이었다. 단 3초 정도 나왔지만 그녀와 그의 음악은 그렇듯 빛났다.

 4악장은 Allegro vivace로 E장조다. 포르티시모를 시작으로 제 1주제가 이어진다. 제 2주제는 D장조로 현악기가 제시한다. 코다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고클에 있는 게시판의 설명을 참조했다. 음악을 그들만의 용어로 풀어내니 삿된 말보다 울림이 적은 듯하다. 너무 많은 말도 사치겠지만 적절히 음악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섬세한 말이 더 나은 듯 보인다.

 라흐마니노프는 신경 쇠약을 앓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는 연약함이 느껴진다. 신경 쇠약을 앓았다는 사실 때문에 연약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연약함을 느끼고선 그의 신경쇠약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한 이해는 그의 음악으로 명징해진다. 수많은 음들이 1악장에선 주로 충돌하듯 부서진다. 광폭하고 거침없다. 허나 2악장, 혹은 3악장에선 종종 그 광폭함이 부러 행했던 ‘위악(僞惡)’ 이런 걸 음으로 증명한다. 사실 나는 섬세하고 연약하니 본인을 괴롭히지 말라며 구걸하듯 애원한다. 라흐마니노프가 들려주는 멜랑콜리하며 얼음장처럼 잔약한 선율의 향연에는 이러한 자기 고백이 있다. 아름답지만 마음껏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수 없는 그 애절한 선율엔 이런 그의 뒷모습이 있다.

 슈만에겐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광기가 있었고 라흐마니노프에겐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이 있었다. 둘의 음악에서 제어할 수 없는 격정이나 분노를 느꼈다면 그건 그들의 자기고백이 성공적이란 방증이다. 물론 차이코프스키에게서도 깊은 슬픔과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애타는 외침을 들을 수 있다. 허나 그의 죽음은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시쁜 눈을 이기지 못한 자살이었다. 슈만이나 라흐마니노프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세속적 성공을 바라며 섬세한 사람이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였다. 제 목숨을 스스로 앗는 일 따윈 생각지 않을 만큼 생의 의지가 그득했기에 신경쇠약은 역설적으로 그를 옮아 맸다. 힘들다며 이해해달라는 고백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엔 담겨있다.

 

 

 

 

 

 

 

 

 

 

 

 

  고흐는 그림으로 보들레르는 시로 세상과의 불화를 증명했듯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으로 제 약함을 드러내고 세상과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 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은 겨울에 알맞다. 몸을 부비고 살갗을 데워 줄 이가 없는 외로운 영혼에겐 그 애절한 외침이 마음을 다습게 해줄 테다. 가을이 브람스의 것이라면 겨울은 라흐마니노프의 것이다. 내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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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1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은 브람스, 겨울은 라흐마니노프군요^^!! 잘 읽고 갑니다아~

바밤바 2010-01-14 20:27   좋아요 0 | URL
너무 추상화시킨 얘기이긴 한데 또 그런게 말의 맛 아니겠습니까~^^
낼 눈 온다는데 눈 길 조심하세요~ㅎ

무해한모리군 2010-01-14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좋아합니다.
반고흐의 영혼의 편지는 그닥 재미가 없어 겨우겨우 읽었지만 ㅋㄷㅋㄷ

바밤바 2010-01-14 20:28   좋아요 0 | URL
음.. 누난 좋아할거 같았어~ ㅎ
글고 환쟁이의 글은 재미가 없을 듯~ ㅎㅎ

Mephistopheles 2010-01-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제대로 들은 적은 없지만....
라흐마니노프하면 기억나는 건 영화 "샤인"에서 데이빗 할프갓을 미치게 만드는데 톡톡한 역활을 해줬던 건 기억하고 있어요..^^

바밤바 2010-01-14 20:30   좋아요 0 | URL
그 피아노 협주곡 3번 같은 경우 요즘 웬만한 피아니스트들은 다 칠 수 있는 듯~ ㅎ
3번 연주는 할프갓 보다는 호로비츠 연주가 최고인 듯 해요.
한음 한음 또렷이 짚어내는 기교가 멋드러지죠^^ 라흐마니노프도 제 곡을 자신보다 더 잘 연주해내는 피아니스트라고 했구요~ㅎ
 


하방 경직성. 임금을 이야기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전공 수업인 노동 경제학 시간에 종종 회자되곤 했다. 높아진 임금은 낮추기 힘들다는 말이다. 임금의 하방 경직성이 임금 체계의 탄력성의 저해하여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막는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이런 하방 경직성은 임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삶과 더 절실히 맞닿아 있다.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난 그 절실함을 명징하게 느꼈다.

새벽에 잠을 깼다. 선잠을 자려 눈을 감았지만 예민해진 신경은 마음만 번잡스레 했다. 구석에 쌓아 둔 한겨레신문을 꺼내 들었다. 신문을 다 보고 나서 구석에 쌓아 둔 신문 더미에 무심코 던졌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오디오가 멈췄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듣고 있던 순간이었다. 별 일 아니라 생각했기에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지만 기계는 시디를 읽지 못했다. 고장 난 것이었다. 새로 산지 반년도 안 되었기에 잠시 짜증도 났지만 동트기 전부터 마음을 핍진케 하는 건 스스로에게 해로웠다. 잠시 명상에 빠졌다.

기계치이긴 하지만 오디오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잠을 깬 것도 억울한데 음악마저 없으면 긴긴밤이 서러울 듯해서이다. 오디오를 분해하고 어찌하다 보니 고쳐진 듯 했다. 허나 기계는 예전과 같지 않게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다시 분해하고선 한 시간을 씨름하다 결국엔 굴복했다. 대안으로 예전에 자주 듣던 미니 콤퍼넌트를 꺼냈다. 그 고적한 품새가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허나 먹먹한 소리는 참기 힘들었다. 좀 더 세밀한 소리를 내는 새 오디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번스타인과 빈필의 ‘라인’ 교향곡을 듣는데 그 묵직함이 끝내 와 닿지 않았다. 관현악은 하나의 악기처럼 뭉툭한 소리를 내고 빈필 특유의 현악 선율은 귀에 감기지 않았다. 이런 도구로 음악을 들었던 예전의 내가 대견했다. 세세한 음의 향연은 잠시 동안 내 것이 아닐 듯하다.

‘일야구도하기’에서 연암(燕巖)이 지적했듯 사람의 마음은 실로 간사한가 보다. 나와 몇 년을 함께한 콤퍼넌트를 시쁜 눈으로 바라보는 내가 다소 안타까웠다. 좀 더 부족하고 좀 덜 가지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겠단 다짐을 한다. 일상에 감사하고 사소한 일에 기꺼워하는 자아가 진정 삶을 밝게 할 테다. 다소 뻔한 아포리즘에 살을 붙이는 건 이런 사소한 경험이다. 고장난 오디오는 음악을 들려주진 못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울리게 했다. 덕분에 어제보다 좀 더 살가운 내가 된 듯하다. 하방경직성이 하방수월성이 될 때 삶은 견디는 게 아니라 영위하는 그 무언가가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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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1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은 (모든 장르가 다 그렇겠지요..) 삶과 맏닿을 때, 그리고 다시 그것을 기억할 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음반을 구입하고 다시 그것을 듣는 까닭은 그 느낌과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고요.

싸구려 CDP와 스피커로 듣고 있지만 다른 장르, 다른 작곡가, 다른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느낌은 다르게 전해져 다행입니다. 언제나 첫번째는 음악 그 자체겠지요.

그나저나 오디오가 고장나셨다니..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그래도 마음의 소리가 울리신다니 부럽네요^^

바밤바 2010-01-12 10:43   좋아요 0 | URL
인문학을 공부하다보니 마음 수양이 절로 되는 것 같아요. 인문학을 삶에 맞추어 공부한 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고장난 오디오가 공간만 차지하여 어찌할 가 걱정입니다. 집에가면 예전처럼 그 뚜렷한 소리를 다시 들려줄거 같단 기대가 드는 것도 사실이구요. 집 떠나기 전 하라세비치의 쇼팽 즉흥곡을 들었습니다. 오래된 녹음에 구식 오디오지만 들려주는 소리는 여전히 좋더군요. 바람결님 덕분에 나날이 수양에 정진하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세요~
 


세상은 다들 제 말만 하고픈 이들로 가득하다. 어딜 가나 말은 넘치는데 소통의 부재를 외친다. 제 말에만 충실한 슬픈 결과다.

아침부터 할 일은 많은데 해찰을 부리며 컴퓨터에 앉았다. 인터넷 상 사람들은 다들 제 말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미욱한 자들은 나르시시즘에 젖은 저만의 말을 남용했고, 조금 영리한 자들은 조목조목 제 생각을 읊으며 나름 공정한 언어인 듯 행동했다. 그런 말의 넘실됨이 편치 않았고 글로 증명된 그들의 생각 또한 성긴 구석으로 그득했다. 핍진한 마음이 말로 드잡이를 하고 어깃장을 부리라 강요했지만 말이 낳을 파장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진 않다.

친구 중에 드라마를 자주 보는 이가 있다. 그는 드라마 속 관계로 세상을 안다 여기며 개별적 사례를 일반화 하려 든다. 기실 드라마 또한 몇 명의 작가가 현실에 빗대어 풀어낸 생각인데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다만 영상이란 매체 활용으로 그 다가감이 간편하단 이점 말고는 책에 비해 하등 나을게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들을 때 마다 그 약한 고리가 쉬이 눈에 띄어 설득은커녕 내 생각을 강화하곤 한다.

결국 언어가 제 존재증명을 위한 가장 절실하면서 편리한 수단이라면 말을 벼릴 필요가 있다. 타인의 생각을 차용하고 제 자신의 생각만 추어올리면 그는 말 그대로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 테다. 말이 말을 낳지만 대부분 그 말들은 맺음을 향해 다가간다. 어떤 맺음이냐는 어떤 말이냐에 달려있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만 보느냐는 아포리즘은 틀렸다. 사람들은 당연히 손가락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손가락에 먼저 눈이 가게 하는 그 낮은 헤아림을 우선 탓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달을 보지 않는다면 시각 자료를 활용하거나 또 다른 유인책을 써야한다. 개인의 시간을 앗는다는 데 그 정도 노력 없이 타인의 미욱함만 탓하는 일은 진정 가엾은 일이다. 제발 제 언어도 감당치 못하면서 타인의 불민함을 탓하지 말자. 그 지적질이 온당하면 자연히 대중은 달을 향해 눈길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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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몸의 언어에 대해서
    from 木筆 2010-03-07 07:52 
      ** 몸의 언어에 대해, 지촉화가나 고흐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반복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한번두번 같은 색이나 무늬, 물결을 그리다보면, 그것이 머리, 가슴을 넘어서 몸으로 그리는 경우, 그 반복이 가져다주는 것은 머리나 가슴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그리고 그 몸의 언어가 고스란히 그것을 음미하는 너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정녕 이런 언어가 있다면, 이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말씀
 
 
2010-01-11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10-01-11 08:43   좋아요 0 | URL
이거 잠결에 쓴 글이라 비공개로 돌릴라고 했는데 여러 사람이 본 거 같네요. 허허~ 우리 맥주 언제 마셔요?^^

무해한모리군 2010-01-11 09:27   좋아요 0 | URL
당신의 뜻대로 ㅋㄷㅋㄷ

Mephistopheles 2010-01-1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군요..으흑...반성해야지..

바밤바 2010-01-12 08:41   좋아요 0 | URL
메피님~ 왜그러세요~ ㅎ 성인군자시잖아요~^^

다락방 2010-01-1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말이죠, 우리가 하나의 글을 읽고 서로 다른걸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글은 분명 하나인데, 우리 둘은 서로 두개의 의견을 가지게 된거죠. 물론 우리 둘중의 하나가 저자의 글을 제대로 이해한 걸수도 있지만, 우리 둘다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을거에요. 우리 둘다 손가락도, 달도 아닌 손톱을 본걸지도 몰라요.

잘 읽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잘 읽었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 달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순 없지만 말이죠.




바밤바 2010-01-12 08:43   좋아요 0 | URL
텍스트가 세상에 공개되면 그걸 해석하는 건 독자의 재량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굳이 저자의 생각을 오롯이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네요.^^
요즘 '무엇이'보다 '어떻게'에 방점을 찍고 생각을 벼리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