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방 경직성. 임금을 이야기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전공 수업인 노동 경제학 시간에 종종 회자되곤 했다. 높아진 임금은 낮추기 힘들다는 말이다. 임금의 하방 경직성이 임금 체계의 탄력성의 저해하여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막는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이런 하방 경직성은 임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삶과 더 절실히 맞닿아 있다.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난 그 절실함을 명징하게 느꼈다.
새벽에 잠을 깼다. 선잠을 자려 눈을 감았지만 예민해진 신경은 마음만 번잡스레 했다. 구석에 쌓아 둔 한겨레신문을 꺼내 들었다. 신문을 다 보고 나서 구석에 쌓아 둔 신문 더미에 무심코 던졌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오디오가 멈췄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듣고 있던 순간이었다. 별 일 아니라 생각했기에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지만 기계는 시디를 읽지 못했다. 고장 난 것이었다. 새로 산지 반년도 안 되었기에 잠시 짜증도 났지만 동트기 전부터 마음을 핍진케 하는 건 스스로에게 해로웠다. 잠시 명상에 빠졌다.
기계치이긴 하지만 오디오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잠을 깬 것도 억울한데 음악마저 없으면 긴긴밤이 서러울 듯해서이다. 오디오를 분해하고 어찌하다 보니 고쳐진 듯 했다. 허나 기계는 예전과 같지 않게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다시 분해하고선 한 시간을 씨름하다 결국엔 굴복했다. 대안으로 예전에 자주 듣던 미니 콤퍼넌트를 꺼냈다. 그 고적한 품새가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허나 먹먹한 소리는 참기 힘들었다. 좀 더 세밀한 소리를 내는 새 오디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번스타인과 빈필의 ‘라인’ 교향곡을 듣는데 그 묵직함이 끝내 와 닿지 않았다. 관현악은 하나의 악기처럼 뭉툭한 소리를 내고 빈필 특유의 현악 선율은 귀에 감기지 않았다. 이런 도구로 음악을 들었던 예전의 내가 대견했다. 세세한 음의 향연은 잠시 동안 내 것이 아닐 듯하다.
‘일야구도하기’에서 연암(燕巖)이 지적했듯 사람의 마음은 실로 간사한가 보다. 나와 몇 년을 함께한 콤퍼넌트를 시쁜 눈으로 바라보는 내가 다소 안타까웠다. 좀 더 부족하고 좀 덜 가지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겠단 다짐을 한다. 일상에 감사하고 사소한 일에 기꺼워하는 자아가 진정 삶을 밝게 할 테다. 다소 뻔한 아포리즘에 살을 붙이는 건 이런 사소한 경험이다. 고장난 오디오는 음악을 들려주진 못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울리게 했다. 덕분에 어제보다 좀 더 살가운 내가 된 듯하다. 하방경직성이 하방수월성이 될 때 삶은 견디는 게 아니라 영위하는 그 무언가가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