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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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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 서른 살의 강을 현명하게 건너는 52가지 방법
김혜남 지음 / 걷는나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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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대한민국 30대를 위한 심리치유 카페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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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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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불매운동’의 파장이 서평이나 음반평을 주로 쓰는 내게도 미친다. 성긴 듯 보이지만 그 어울림이 실로 헤아리기 방대한 블로그 문화 덕일 테다. 기실 알라딘 불매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취업을 준비해야하는 졸업예정자였고 그러한 사회 문제는 이전부터 충분히 인지해왔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마틴 니뮐러’ 목사의 시를 언급하며 주변 일에 무심한 이를 종종 돌아보게끔 한다. 허나 내겐 그다지 와 닿지 않은 아포리즘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결국 자기 안위를 위해서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는 맺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자그마한 참음이 내 안정을 해칠 수 있으니 미리 나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의 시를 이해했다. 정언명령처럼 ‘그것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식의 주장만이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평생 그런 불안에 떨지 않을 명문가나 재벌의 자손이라면 마틴 니뮐러의 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지적 유희의 수단일 뿐이다. 불안을 자극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은 그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운동의 추진력을 잃는다. 뭐가 옳은 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밑바닥에 남은 사유를 긁어모아 행동하는 게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 좋다고 여긴다. 점진적 개안을 통한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유다.

기실 나 또한 불매운동이 불편했다. 아무도 불매운동을 강요하지 않는데 왜 불편하냐는 물음이 종종 제기 되곤 한다. 왜 불편할까? 기실 사람들은 사회 속에 부조리한 현상을 종종 보곤 한다. 제 책상을 닦아주는 청소 아주머니의 고단한 삶을 보며 비정규직 문제를 절실히 느낀다.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상사가 불합리한 일을 강요할 때면 사회의 미시적 폭력에 염증도 느꼈을 테다. 여성에게 행해지는 은근한 성차별적 발언과 술자리를 강요하는 ‘으쌰으쌰’ 분위기에서도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허나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선 대부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문제제기를 한다손 치면 사회적 부적응자가 되거나 밥벌이 수단이 끊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던적스러움’을 견딘다. 하지만 자기혐오나 비겁한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반성기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나쁜 놈이 성공하는 사회’는 허버트 스펜서식 사회적 진화론이 팽배한 현 사회에서 당연한 결과다.

알라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봐선 먹물이거나 다소 불만 많은 사람들에 속한다. 그들은 알라딘이란 가상공간에서 사회의 묵은 때를 씻고 조금 더 이상향적인 사회를 꿈꾼다. 비루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알라딘에서 찾은 거다. 헌데 비정규직 문제가 거론되면서 그들은 다시금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됐다. 일상에선 밥벌이란 핑계로 이리도 비겁했거늘 가상공간에서 제가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 사맛디 아니함의 모순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다. ‘놀이의 공간’이 ‘투쟁의 장’으로 변하는 광경에서 그들은 다시금 지겨운 밥벌이에서처럼 ‘마주하기 싫은 현실’을 오롯이 맞이해야 했다.

물론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의 선의를 알고 그 진정성을 믿기에 이러한 불편함을 내비치기 힘들다. 잔망스런 사람이 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기에 담론은 한쪽으로 쏠린다. 이런 과한 쏠림에서 과격파가 득세할 수밖에 없는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테다. 또한 불편함이란 증명하기 힘든 감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의 사기를 꺾지 말라는 말도 나돈다. 어떤 것이 ‘확신’이 되고 타인의 감정을 자지레한 것으로 치부할 그 무엇이 된다면 거기엔 조그마한 브레이크가 달려야 한다고 본다. 옳은 일을 한다는 이유가 자잘한 폭력을 용서해줄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글이란 성긴 구석이 있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마음에 차지 않을 약한 고리가 있을 수도 있다. 허나 글 하나하나를 논박하며 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순간 말은 넘치고 감정은 상하기 마련이다. 제 자신의 말을 강제하기 전에 그 강제가 실로 온건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혹 강제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그 행동으로 불편해 했다면 그 불편함에 대해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소통보다 대의를 중시하는 이념이 얼마나 많은 미시 파시즘과 폭력을 낳았는지 안다면 말이다. 타인의 비겁함을 논박하며 자신의 옳음에 천착하는 잔다르크식 일종의 ‘메시아 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다.

이 글 또한 성긴 구석이 많아 논박을 당한 여지가 상당하다. 혹 논박을 가하더라도 생채기를 내기 위한 말은 삼갔으면 한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를 꿈꾸는 이라면 보둠의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개인적 생각이다. 낮잠을 잤더니 잠이 안 온다. 오늘 밤엔 박범신의 고산자를 다 읽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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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였다. 선배는 우리나라 실업률이 너무 낮다고 했다. 앞으로 선진국처럼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실업률이 나타날 거라 말했다. 수많은 반론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가슴에 삭혔다. 기실 술자리만큼 위계질서가 흐트러진 듯 하며 개인의 품성을 재단하는 자리가 없다. 그렇기에 예의 그 좋은 사람이란 평판을 유지하고 팠는지 모른다. 참고로 선배는 주요 언론사 15년차 경제부 기자다.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결코 낮은 게 아니다.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는 의무병 비율이 높다. 4주 동안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자로 분류 되지만 그 기간 중 1시간이라도 일을 하면 실업자에서 제외된다. 또한 정부가 양산한 희망 근로 프로젝트나 기업과 구직자 모두 싫어하는 인턴 제도도 실업률을 낮추는데 기여한다.

수많은 비정규직은 자신을 취업자와 실업자의 경계인 정도로 여긴다. 불안정한 지위 탓이다. 비정규직 법이 논란이 됐을 때도 이들의 불안을 걱정하는 의견이 많았다. 비정규직 자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는 발본색원(拔本塞源)의 의견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암묵적으로 비정규직 자체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테다. 서구에서도 비정규직을 통해 고용 시장 유연화를 이룩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문제는 서구와 우리의 제반 여건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덴마크나 노르딕 국가의 경우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일을 적게 하는 대신 임금을 적게 받는 협상도 가능하다. 비정규직 양산이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공리 위에서나 성립한다. 허나 우리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급여 차이가 심하다. 노동 시장 유연화를 언급하며 시장 경제 발전 운운하기엔 유연화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노동자의 짐이 너무 무겁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경쟁 업체에서도 원가 절감을 이유로 임금이 저렴한 비정규직을 많이 고용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자본가가 탐욕스럽다고 하지만 알프레드 마셜이 이야기 했듯 탐욕 보단 영구적 생존을 위해 애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국 자본가는 이익 확대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다. 기업 측을 무조건 탓할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이런 환경은 왜 만들어졌나. 굳이 찾자면 IMF 시대에 무리하게 이식한 신자유주의가 원인이다.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의 역할이 크지 않고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힌 한국인은 비정규직을 양산해서라도 국가를 살려야 했다. 20%를 살리자고 전부가 죽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차후 벌어질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리 국채를 갚고 국난을 이겨내는 게 중요했다.

이렇듯 강요된 사회적 합의에 의해 비정규직은 양산되었고 평생 고용 신화는 붕괴됐다. OECD 국가 가운데 유달리 자영업 비중이 높은 배경에는 기업을 믿지 못하는 경제주체의 생존 본능이 있다. 그때까지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찰은 미미했다. 국채를 다 갚고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며 빈부 격차가 심화될 기미가 보이자 정부는 카드 발급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 이런 경기 부양은 카드 대란을 낳고 다시금 가정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비정규직 문제는 꾸준히 차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08년에 터진 금융위기는 ‘잡 셰어링’이란 명목하에 새로이 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인력을 쥐어짰다. 정규직의 생존마저 더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결국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의 성공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되었다.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구획되어진 문제가 아니라 잭슨 폴록의 페인팅마냥 마구 흩어져 있기에 그렇다. 그나마 타개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대부분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게 되겠다. OECD 국가 가운데 노동 강도가 가장 센 우리나라이니 정규직의 업무를 줄여 다른 정규직을 늘리는 방안을 모색할 만하다. 기업의 선의를 바라기엔 그들 각자의 경쟁이 치열하고 정부의 지원을 바라는 건 부의 이전만 낳을 뿐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미첼 폴라니가 말한 ‘암묵지’를 강조하며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걸 정규직 확대의 인센티브로 삼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이뤄지려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실로 난망(難望)한 일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듯 진지를 구축해 토대를 새로 쌓는 일도 어려워 보인다.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것인 냥 착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그들 각자는 사회적 공공선을 위해 애써 줄 유인이 없다고 하겠다.

헌데 서구에선 68 혁명이 이후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가지려 애썼다. 그들이 특별히 경제적 인간이라서 그랬다고 보긴 힘들다. 양보가 더 큰 이익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제학적 툴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게임이론에서 말하듯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사익 추구를 통해 전체적 효용 저하를 종종 낳기 때문이다. 그 배경은 아마도 ‘인문학적 소양’ 때문일 테다. 사회와 역사, 그리고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면 무엇이 자신을 옮아 매는지 알게 하는 힘이 생긴다. 일찍부터 시민사회가 성숙했고 자기 성찰을 중시했던 일종의 서구적 ‘아비투스’가 그러한 차이를 낳지 않았을까.

현재 알라딘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불매 운동 또한 비정규직 문제로 시작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 비정규직 문제는 한 기업의 노력이나 시민 단체의 운동만으론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문제를 직시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조그마한 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덴 한계가 있다. 물론 강준만이 말했듯 근본적 해결책만을 강조하는 건 아예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근본적 해결은 말 그대로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그래도 각자가 개안(開眼)하여 점점 팍팍해져 가는 세상의 방향을 돌리려 애쓰는 점진적 발전이 중요하다고 본다. 개량주의자라며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은 보통 성품의 차이라 본다.

그래서 로쟈님의 서재는 중요하다. 그는 세상을 겹눈으로 바라보게끔 하고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굳이 밥벌이에 도움이 되진 않지만 제 시간을 쪼개 앎의 기쁨을 나누고 좀 더 다른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려 애쓴다. 그의 온건함과 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않는 행태를 보고 누군가는 개량주의자라 폄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투쟁 방식의 다름이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같이 같은 목적을 위해 누군가는 온건하게 누군가는 치열하게 제 입장을 견지하는 거다. 주적이 누군지는 서로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같은 투쟁 전선에 있으면서 온건한 자에게 극심한 적개심을 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에서처럼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생채기를 내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다. 누군가의 무심한 태도에 대해 날을 세우기 전에 자신의 맹목적 확신이 타인을 얼마나 다치게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대의를 위해 몇몇의 아픔은 쉬이 묵과하는 전체주의의 유전자가 본인에겐 없는지 살펴야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같이 사회적 안정망이 취약한 나라에서 실업률이 높아진다는 건 또 다른 계급 사회의 도래와 삶을 영위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자가 많아진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이 그만큼 아파하고 힘들어해 본 사람이 고백의 언어로 말했을 때야 그 말은 잠언이 된다. 한국의 실업률은 좀 더 낮아져야 한다. 하석상대(下石上臺)의 형태가 아닌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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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분을 위한 변명 2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0-01-03 20:51 
    바밤바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로쟈님의 서재는 중요하다. 그는 세상을 겹눈으로 바라보게끔 하고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굳이 밥벌이에 도움이 되진 않지만 제 시간을 쪼개 앎의 기쁨을 나누고 좀 더 다른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려 애쓴다. 그의 온건함과 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않는 행태를 보고 누군가는 개량주의자라 폄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투쟁 방식의 다름이다.] 네, 그렇습니다. 허나 굳이 바밤바 님의 지적
 
 
2010-01-03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들 그들 각자의 사정이 중요하다. 자신이 힘들면 타인의 아픔은 다독일 무엇이 아니라 객관화된 자기위안의 수단일 따름이다. 제 아무리 절실한 아픔도 홀로 고민하는 그 사소한 번뇌에 비하면 잗다란 일이다. 타인이 제 번뇌를 사소하다 말할 때엔 불같이 화를 낸다. 그 절실함은 그대들의 사소함에 비해 지극히 정당한 것이기에 그렇다.

 문제는 이런 묘한 엇갈림이 충돌할 때 나타난다. 다들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느라 타인의 고민을 사치로 여기는 잔망스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이런 의견 표명은 충돌을 낳고 심할 땐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려 극진히 애쓰기도 한다. 맞닿음이 일어나지 않는 언어의 성찬은 제 절실함을 가중시키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벽을 쌓게 한다. 타인의 진정성 부족을 탓하지만 기실 그들 각자는 제 자신이 여기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요즘 지인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캐릭터란 본인이 생각하는 자아상이 아니라 주위 평가의 누적분일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김어준 씨가 말한 ‘인생이란 개인의 자잘한 선택의 누적분’이란 말에서 약간 틀었다. 다들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각자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힘쓰고 인맥이 넓고 평판이 좋은 자를 좇으려 한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에 ‘자기객관화’가 덜 된 양태를 자주 띈다. 제 자신의 좋은 면을 과대평가하고 자기에게 쏟아지는 자지레한 비판은 진정 자신을 알지 못해 여기는 미욱함의 소산이라 여긴다. 기실 불민한 것은 제 자신이지만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려면 ‘나르시시즘’이란 존립의 근거를 훼손해야 하기에 가당치 않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조금 비틀자면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한다. 기실 데카르트가 말했던 확고한 사실조차 그 존립기반이 근대 이후 해체되었다. 허나 대중은 데카르트의 아포리즘만 알길 원한다. 그게 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기 때문이다.

 누군가 실존에 관련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절실하다. 밥벌이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절실하다. 절실함의 층위가 있을 순 없지만 사회적 인식을 받아들이고 사유를 좀 더 벼린다면 위 말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밥벌이의 하찮음을 말하고 제 ‘인정투쟁’만 강조한다면 끝까지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다. 과대망상증에 빠져 타인의 말로 제 자신을 해하고 신분상승의 의지만 불태우는 사람에겐 ‘자아와 타아와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 모짊이 헤아리기 어렵고 마음에 사무친다. 헛된 말을 내뱉으며 타인을 위로하고 제 자신에 침강하는 말이 미만하여 생각이 글에 미친다.

 덧붙여 로쟈님은 힘내시길 바란다. 김훈이 이야기 했듯 ‘너는 어느 쪽이냐 묻는 말들에 대해’ 일일이 답해 줄 필요는 없다. 생각이 언어에 포개져 애써 숨기려 해도 드러날 때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분의 안티가 느는 듯하다. 누군가의 팬을 자처하는 일이 극히 드문 내가 그분을 각별히 우러르기에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자는 뻔한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냥 튀어나온 못을 두드리듯, 그 매정한 망치질이 야속할 따름이다. 하물며 그 못이 온당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글의 서두와 결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다소 다른 두 개의 불쾌한 감정이 어울려지다보니 그리 됐다. 이렇게 글로써 나는 스스로의 미욱함을 드러낸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내 부족함을 알기에 최소한 어떤 이들보다 하나는 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나르시시즘이 흩어진 근자에 이러한 얇은 사유하나가 존립의 기반이 된다. 그저 웃는다. 여전히 서울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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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잠을 설쳤다. 친구가 내 방에서 자게 되어 객(客)을 존중하는 마음에 그의 생활리듬에 나를 맞춰야 한 탓이다. 눈을 뜬 채로 긴긴밤을 지새웠다. 동주는 밤하늘을 보고선 별을 헤아렸다지만 내겐 어두컴컴한 천장만 검은빛으로 제 존재를 드러냈다. 수많은 명상 속에 새해를 맞아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꿈처럼 살아왔던 지난날이 ‘즐김’이 아닌 ‘견딤’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찰나(刹那)였다.

부러 나를 꾸미려한 적은 없었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하고 현실을 잘못됨을 지적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시나브로 야위어가고 인간관계도 옅어져갔다. 따스히 보듬어야했고 내 미욱함을 고백했어야 했는데 말로 나를 감싸고 글로 나를 치장했더랬다. 점점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쟁여둔 미움과 분노만 남았다. 그렇게 얼룩진 마음이 천장에 그려졌다. 거울처럼 나를 샅샅이 비쳐냈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고 피가 도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고해성사를 한 기분이었다.

그릇된 일을 저질러 놓곤 나를 감싸기에 급급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왜 세상을 흑백논리로 재단했을까.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했으면서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그들을 왜 원망했나. 나를 떠받드는 켜켜이 쌓인 논리에 매몰돼 왜 스스로를 학대했나. 이런저런 생각들 덕에 마음이 한결 푼푼해졌다.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인생이란 실에서 매듭을 찾기 어려웠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고 나는 그 덧없음 속에서 유장한 흐름만 좇았다. 유년 시절엔 한 학년이 끝나면 자연히 매듭이 지어졌지만 20살 이후론 달랐다. 누군가 매듭을 지어주지 않고 내가 매듭을 묶어야 하는 능동적 사고가 요구됐다. 서투른 재주로 매듭을 지으려다 보니 성긴 매듭이 많았고 어떤 매듭은 체 짓지도 못한 채 인생은 흘러갔다. 내 성긴 인생의 실타래를 바라보며 조금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망해 본다. 내가 자아낸 실을 애틋함보단 대견함으로 바라보기로 한다.

이제 내가 가진 미의식(美意識)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음을 쏟을 때다. 어제 본 ‘전우치’란 영화에선 쇼팽 작품번호 25번의 11번 ‘겨울바람’이 흘러 나왔다. 여인의 차디찬 냉기가 흐르기 직전의 선곡이었다. 쇼팽보다 잔약하고 여인네보다 시린 오늘이다. 그래도 마음이 따스하니 적이 만족스럽다. 내게 불면의 밤을 선사해준 자랑 같은 친구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다. 참고로 강동원은 내 초등학교 2년 선배다. 남양초등학교가 자랑스럽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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