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는 그 치유 방법을 손에 쥐고 있는 경우, 가련하게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 내가 서적들에서 끌어내는 모든 성과는 이런 어구의 실천과 적용으로 되어 있다. 사실 나는 책을 모르는 자들만큼이나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책을 가지고 즐긴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그것을 즐길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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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데에도 어떤 '질서'가 필요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려 봤다. 우리 속담에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이 있고, 비슷한 뜻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책유서(冊冊有序)라는 말은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면 책과 책 사이에는 아무런 순서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는 걸까.
꼭 그렇게 단정지을 일은 아닌 듯하다. 어릴 때 동네에서 훈장 어르신한테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운 기억이 있는데, 그 때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먹은 형들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웠더랬다. 책을 배우는 '순서'가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얘기다. 천자도 모르는 아이가 그 '기본서'를 뛰어 넘어 곧바로 명심보감을 배워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동이나 청소년이 성인들이 읽는 어려운 책들을 읽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나면 책에서 느껴지는 어떤 '난이도'가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슬쩍 사라지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책에 내재된 '난이도'는 여전히 남는다. 어떤 책들은 펼쳐서 몇 쪽도 채 넘기지 못하고 황망히 덮고 말 때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당혹감을 느꼈던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다.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을 배울 때의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책들을 가끔씩 만났다. 니체의 책들도 한 때는 '딴 세계의 언어'로 쓰인 것처럼 느껴졌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 오비디우스의 『변신』등도 한때나마 내게 그런 당혹감을 안겨줬던 책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험한 산'처럼 느껴지는 책들을 어떤 식으로든 힘겹게 넘고 보니 차츰 '요령'이 생기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책을 읽는 '알맞은 순서'라고나 할까, 혹은 '알맞은 타이밍'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을 내 스스로 알아서 맞추는 식으로 책을 읽을 때가 생기더라는 얘기다.
어떤 책들이 '알맞은 때'를 만나게 되면 정말 여느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가슴에 팍팍 파고들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책들은 도대체 내가 왜 하필 '지금 꼭' 이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할까 싶은 느낌이 드는 책도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아예 작정을 하고 씨름을 하듯 맞붙어 씩씩거리더라도 결국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나 자신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날 때조차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를 두고 어찌 책 탓만 할 수 있을까. 그게 바로 어쩌면 그 책을 읽는 '알맞은 타이밍'이 아직은 아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떤 일들을 진척시키다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때가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제 머지 않아 어떤 결실을 맛볼 때가 임박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찾아 온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만하면 때가 무르익었지 싶은 데도 도대체 감감무소식인 상태가 지속될 때가 있다. 말하자면 '감'이 무르익어 곧 떨어질 때가 된 듯싶은데 도대체 그 감이 언제 떨어질지 도무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될 때, 다시 말하자면 감나무 아래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벌린 입만 아플 때,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벌린 입을 그만 다물고 감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덜 익은 감'이라도 따 먹어야 옳은 일일까. 아니면 감이 언제 무르익을지 좀 더 확실하게 살핀 뒤에 '알맞은 때'를 기다려 나중에 다시 감나무를 찾아야 옳은 일일까.
대략 10년 전쯤의 일이 생각난다. 언젠가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내가 발견했던 사자성어 하나가 이런 고민에 딱 맞는 해답을 제시해 주는 듯해서 무릎을 치며 경탄한 적이 있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었다. 벽암록(碧巖錄)이라는 책에 그 말이 나온다고 해서 서둘러 도서관으로 냉큼 달려가 그 책을 빌려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이야말로 내게는 언감생심이었다. 도대체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책이 결코 아니었다.『벽암록(碧巖錄)』은 중국 당나라 이후 불교 선승(禪僧)들이 전개한 대표적 선문답을 가려 뽑아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사가 펴낸 『송고백칙(頌古百則)』에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가 또다시 문제 제기와 해석을 첨가했다고 한다. 책의 유래만 살펴 봐도 마치 무림고수들이 간난신고 끝에 얻게 되는 기서(奇書)처럼 들린다.
동양의 선문답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서양의 이름난 고전들도 읽기 난해한 책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령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만 해도 '신들의 계보'와 '신들의 행각'을 미리 알지 않으면 제대로 읽기 어렵다. 그 두 서사시를 읽기 위해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와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 혹은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작품들도 여전히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미리 읽을 필요가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과 같은 작품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책들 속에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담긴 이야기들이 마치 기본 텍스트처럼, 혹은 독자들이 이미 당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운율을 가미한 서사시'로 '노래'한다. 그러니 압축과 비약과 비유가 난무하는 '고대 시인의 노래'를 곧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당연지사일지 모르겠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 때 경연을 벌였던 '그리스 비극'을 먼저 읽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애기인지 전혀 감을 잡기 어렵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헛수고일 뿐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지만 무딘 도끼로 거목을 쓰러뜨리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몰리에르의 작품까지 두루 섭렵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정도는 미리 읽는 게 아무래도 그 책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운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서양의 이름난 고전들도 더러는 서로 난마처럼 얽혀 있어서 적당한 '선행 독서'가 결여된 채 그 책들에 다가서는 독자들을 여간 당혹스럽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음악'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 때도 있다. 사실 음악은 다른 '선행 과목들'에 비해선 부수적인 요소일지도 모른다. 니체의 책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도 적잖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비롯한 숱한 철학자들도 미리 알아야 한다. 어쨌든 니체의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슈만, 쇼팽, 리스트, 드뷔시, 비제, 롯시니의 음악도 함께 알면 더욱 좋다. 그들의 음악을 모른 채 니체의 책을 읽는다면, 그가 들려주는 숱한 음악 얘기들이 결국 '소 귀에 경읽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마침 오늘 아침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니체가 작곡했다는 가곡도 들을 수 있었다. 디트리 피셔 디스카우의 음성이었다. 그 해설자는 심지어 '니체의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회에도 한두 차례 참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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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 세 권과 그가 쓴 에세이『배신당한 유언들』을 읽으면서 '책 읽는 순서'에 대해 거듭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을 펼치자 말자 나오는 제1부의 제목부터가 나에겐 몹시 낯설었다.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는 날>이라니, 쿤데라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파뉘르주가 도대체 누굴까? 얼핏 사람 이름인 듯하기도 하고... 어쨌든 그 책의 첫 문단을 여기에 인용해 보자.
마담 그랑구지에르는 임신 후 내장 요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수렴제를 복용해야 했다. 이 약이 너무 독해 태반엽이 풀려 버렸고, 태아 가르강튀아는 정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맥을 타고 올라 어머니의 귀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이 책은 첫 문장에서부터 자신의 수법을 내보인다. 즉, 여기서 하는 얘기는 진실하지 않다는 것,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진실(과학적이거나 신화적인)을 주장하지 않으며, 사실들을 현실 그대로 묘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어도 파뉘르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가르강튀아는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에 등장하는 거인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건만,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하다. 다음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찾기 시작한다.
행복한 라블레 시대. 소설이라는 나비가 번데기 잔해들을 짊어진 채 날아오른다. 거인 형상을 한 팡타그뤼엘이 여전히 환상적 콩트들의 과거에 속했다면, 파뉘르주는 당시 소설이 아직 모르는 미래에서 온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이라는 이 특별한 순간은 라블레의 책에 놀랄 만한 풍요로움을 부여한다. 모든 것이 거기 있다. 사실임 직한 것과 사실임 직하지 않은 것, 알레고리, 풍자, 거인과 일반인, 일화, 명상, 실제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여행, 현학적인 언쟁, 순수한 말재간으로 이루어진 여담 등. 19세기의 후예인 오늘날의 소설가는 초기 소설가들의 이 멋들어지게 혼합된 세계에, 그들이 누리는 유쾌한 자유에 시기심 어린 향수를 느낀다.
이제야 조금 더 뚜렷해진다. 쿤데라는 1534년에 처음 발표된 라블레의 풍자 소설을 통해 '소설의 화려한 비상'을 발견했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소설의 무한한 가능성'을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뒤이어 쿤데라는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인용하고, 라블레의 『팡타그뤼엘-제4서』를 인용하면서 '소설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음의 인용문을 내세우면서.
옥타비오 파스는 말한다. "호메로스도 베르길리우스도 유머를 알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머를 느낀 듯하지만, 유머는 다만 세르반테스에 이르러서야 형태를 취한다. (……) 유머는 현대 정신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유머는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인간이 실천해 온 게 아니라 소설의 탄생과 관계된 하나의 발명이라는 것, 이는 대단히 중요한 발상이다. 유머는 웃음이나 조소, 풍자가 아니라 희극성의 특별한 한 종류라는 것. 이에 대해 파스는(이야말로 유머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인데) 이것은 "자신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라고 말한다. 파뉘르주가 후생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으며 양 상인들을 익사시키는 장면을 즐거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는 소설 예술에 대해 영원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겨우 이 책의 4쪽까지의 내용이다. 아직 갈 길이 까마득히 남았다는 얘기다. 쿤데라는 다음 단락에서 곧바로 자신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이별의 왈츠』를 꺼내 든다. 그 작품을 설명하면서 『팡타그뤼엘 - 제4서』의 내용과 연결한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를 내세워 설명을 이어간다. 그 다음 단락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내세우며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멋진 문장을 인용한다. 그 다음엔? 곧바로 자신의 작품 『농담』과 『삶은 다른 곳에』와 『불멸』을 꺼내 든다. 그 다음엔 다시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로 되돌아 가고, 뒤이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다시 잇따라 나온다. 곧이어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나오고, 다시 『악마의 시』와 『팡타그뤼엘』이 나오고 나서야 겨우 제1부가 마무리된다. 1부의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게 끝난다.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에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면 유머는 "현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늘 여기 있었던 게 아니요, 늘 여기 있을 것도 아니다.
나는 파뉘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을 날을 생각하며 가슴 졸인다.
내가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은 건 고작 네 권밖에 안 된다.(『정체성』, 『생은 다른 곳에』는 아직 읽지 못했다.) 또한 밀란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제1부를 마칠 때까지 언급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책은 이때까지만 해도 딸랑 『돈키호테』한 작품뿐이었다.(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그 책을 읽고 나서 읽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지는 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책을 너무 일찍 집어든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참고 읽다 보면 좀 더 익숙한 작품들도 더러 나오겠지 하는 생각과,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 세 권의 후광(?)에 막연히 기댄 채 어쨌든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갈수록 태산이었다. 내가 모르는 책들, 내기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봇물처럼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끔씩 위로를 받을 일이 있었다면, 앞서 얘기했던 쿤데라의 3부작(『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과 더불어 (결정적으로)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 유언을 둘러싼 얘기가 아주 흥미롭게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카프카의 작품들을 읽었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카프카를 다시 만나는 일이 내심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사실 카프카와 쿤데라의 작품은 작년 봄에 프라하에 갈 때만 하더라도 내게는 겨우 '이름만 아는 작가'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프라하에 갔을 때조차 이 유명한 작가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체코의 서점' 같은 델 들를 생각조차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라하'는 내게 '음악의 도시'로 더 친근했다. 오래 전에 프라하 필하모닉 내한 공연 연주회가 열릴 때에도 '프라하의 음색'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고, 체코 출신의 음악가들인 드보르작, 바르토크, 스메타나의 작품들도 즐겨 들었었다. 더군다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태생인 모차르트를 (그의 주무대였던) 빈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각별히 사랑한 도시로도 이미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이쯤에서 작년 봄에 프라하에 갔을 때 담았던 풍경들을 조금 소개하는 것도 그리 나쁠 건 없지 싶다. 어쨌든 나는 그 도시에 한번 발을 디딘 후로는 좀체로 그 도시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나는 '프라하' 하면 금세 떠오르는 그 유명한 두 작가(카프카와 쿤데라)의 작품들을 그때까지 전혀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들을 이미 감명깊게 읽은 독자들이 느낄 법한 '독특한 감정'을 전혀 맛볼 수 없었다. 나의 경우엔 오히려 '순서'가 정반대였다. 프라하를 다녀온 후에 카프카의 『성』, 『소송』, 『변신』, 『심판』등을 읽었다.(특히 그의『성』은 내가 봤던 '프라하 성'과는 여러모로 너무나도 달라서 깜짝 놀랐다.) 어쨌든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서 내가 찾았던 '프라하의 이미지'를 떠올릴 일은 거의 없었다.(카프카의 소설 속엔 프라하, 블타바 강, 프라하의 봄 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쿤데라의 작품 속으로 들어선 이후에는 어느새 '프라하'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있는 도시처럼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농담』에서 루드비크가 오스트라바에서 루치에를 황망하게 잃어비린 후 오랜 세월 뒤에 프라하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때로는 이처럼 '책을 읽는 순서'가 묘하게 뒤바뀌어도(그러니까 작가의 출신지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시를 직접 다녀온 직후에 그 작품들을 읽는 경우) 책을 읽는 재미가 갑자기 몇 배나 부풀어 오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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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에 도착한 첫날밤, 가이드와 함께 '맥주나 한잔' 마시러 나갔다가 '제대로' 만난 '프라하 성'의 야경.
- 우리가 묵은 호텔이 마침 카를교 바로 옆이었다.(이 사진을 찍은 곳이 호텔 바로 앞이다.)
밤늦게 카를교를 지나 호텔 앞까지 다 왔는데도 프라하의 야경에 반해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 이튿날 아침, 카를교 교각 너머의 한산한 아침 풍경.
- '영화 또는 소설 속의 한 장면'이 절로 연상될 만큼 건물들이 이색적이고 아름답다.
- 프라하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프라하 성에 올랐다. 체코 경비병들의 표정이 사뭇 엄숙하다.
프라하 성은 1천 년이 넘은 고성이지만, 현직 대통령 관저도 여기에 함께 있다.
- 프라하 성에서 내려다본 프라하 시내 전경. 한가운데 카를교와 교탑이 보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가 토마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올랐던 언덕이 바로 이 근처였을까?
- 프라하 성을 대표하는 성 비투스 성당의 모습. 24mm 광각렌즈로도 간신히 담을 만큼 몹시 웅장했다.
보헤미아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바츨라프가 10세기에 지은 교회를 재건축하고 나중에 고딕 양식을 더했다.
- 프라하 성 안쪽 광장에 가득 모인 관광객들
- 황금소로.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해 모여들었던 곳이다. 우리말 안내 간판이 눈에 띈다.
- 프란츠 카프카가 살았던 그의 여동생의 집도 보존돼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카프카는 바로 이곳에서『성』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황금소로에서 만난 풍경. 혹시나 '카프카'가 아닐까 싶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 프라하 성에서 내려와 바츨라프 광장을 찾았다.
여기가 바로 1968년에 소련 탱크가 시위대를 깔아뭉갰던 '프라하의 봄' 현장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여주인공 테레자도 '바로 그 당시' 사진기자로 여기에 있었다!
- 바츨라프 광장 한 켠에 서 있는 건물들과 흰 구름들.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 프라하 시내 중앙시장 풍경. 맨 왼쪽 청년은 이제 보니 마치 '카프카'를 닮은 듯하다. 나만의 착각인가?
- 구시청사 광장에서 가장 명물은 단연 이 '천문시계'이다. 무려 15세기에 만들어진 시계.
-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쇼'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초침이 정각을 알리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인형이 움직이며 종을 치고, 두 개의 창문에서는 12사도가 등장한다.
허영을 상징하는 거울을 보는 자, 돈지갑을 움켜쥔 유대인, 음악을 연주하는 터키인도 등장하여
죽음 앞에 이 모든 것이 쓸데없음을 보여준다고.
- 유대인이었던 카프카는 어린 시절 이 시계 속의 탐욕스러운 유대인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한다.
- 소설 『블멸』에 등장하는 '쿤데라 선생님'은 이 시계탑 앞을 '천 번도 더 지나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 구시청사 광장 한가운데는 얀 후스(Jan Huss)의 동상이 있다.(왼켠 붉은 지붕 건물 앞에 어둑하게 보이는 동상)
후스는 체코의 종교개혁가로, 체코의 철자법을 개량하고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한 사람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카를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쿤데라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도 등장한다.
- 오후 4시 정각을 가리키자 또다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짧은 쇼지만 인생의 교훈을 준다고 한다.
- 구시청사는 1338년에 지어졌고, 마주 보이는 틴 성당은 1365년에 세워졌다고.
이 성당은 종교개혁 당시에 후스파의 거점 역할을 떠맡았다고 한다. 두 개의 탑은 아담과 이브를 상징한다고.
- 카를교 교탑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
- 카를교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린다.
600년 전에 만들어졌고, 다리 위에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 블타바강 너머로 보이는 프라하 성의 웅장한 모습. 전장 약 435km. 독일 명칭으로는 몰다우강이라고 한다.
스메타나의 교향시《블타바》는 이 강의 아름다운 흐름을 묘사한 체코의 대표적인 음악 작품이다.
- 일행들과 함께 한 관광 일정이 모두 끝난 뒤 홀로 구시청사 시계탑을 다시 찾았다.
시계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내려다 보니 '프라하의 심장'이라는 '구시청사 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 시계탑 꼭대기에서 프라하 여행 책자에서 미리 봤던 '익숙한 풍경'을 담아 봤다.
- 창틀 너머 건너편으로 틴 성당의 두 개의 탑이 빤히 바라다 보인다.
- 시계탑에서 내려와 일행들이 머무는 술집을 홀로 찾아갔다. 족히 한 시간 이상은 헤맨 듯하다.
우플레쿠(U Fleku)라는 술집으로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비어홀'이다.
체코 국민들은 스메타나를 최고의 작곡가로 여긴다.
보헤미아 집시처럼 보이는 아코디언 연주자에게 스메타나의 <블타바> 연주를 직접 부탁해서 들었다.
-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본 카를교 교탑 주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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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로 되돌아 오자. 그 작품에는 숱한 소설가들의 소설 작품만 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쿤데라 자신이 한때 음악에 깊이 몰두했던 작가였던 만큼 체코의 음악 영웅인 야나체크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야나체크는 소설 『농담』에도 야로슬라프라는 인물을 통해 여러 차례 등장했던 바로 그 음악가다. 야나체크의 음악은 특히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 때문에 곧잘 작곡가의 진정한 의도가 무시된 채 의도적으로 '편곡'되어 연주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작곡가가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태연스레 벌어지곤 했다. 작곡가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쿤데라가 말하고 싶었던 '배신당한 유언들'은 카프카 등 몇몇 소설가의 작품 뿐만 아니라 음악가의 작품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기쁨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일종의 서글픔을 느꼈다면 그건 대부분 나 자신의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비롯된 문제였다. 야나체크의 음악에 대해 쿤데라는 심지어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악보'까지 그려가면서 매우 친절한 설명을 제시해 주었지만, 그걸 만족할 만큼 알아들을 수 없는 내 처지를 절감할 때마다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었다. 쿤데라는 참으로 매혹적인 작가이지만 때때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해 우리가 미리 음악 공부까지 따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접근이야말로 어쩌면 본말이 전도된 일일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의 범위 내에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배신당한 유언들』에 나오는 숱한 걸작들을 모두 언급한다면 그런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쿤데라를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쿤데라는 이 책 속에서 '소설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감동적일 정도로 아주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작가의 그런 심오한 뜻을 내가 이 글에서 제대로 전달하기란 애시당초에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그런 뜻을 내가 얼마간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작가가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뜻을 왜곡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로서는 그의 책 속에서 새삼스레 알게 된 숱한 매혹적인 작품들을 조금이나마 더 소개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다.
사실 나는 일부러 '책을 소개하는 책'은 가급적 따로 찾아서 읽기를 몹시 주저하는 편이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내 스스로 어떤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자칫 잘못 판단하는 데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런 점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심지어 나는 니체의 책들을 읽는 동안에도 '니체를 설명하는 책들'은 여태껏 한 권도 들춰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로서는 니체의 정수를 오로지 니체를 통해서만 느끼고 싶은 욕심을 너무 앞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책세상 니체 전집』은 니체에 대한 오독을 방지하기 위해 '주석'조차 달지 못하도록 막았다. 쿤데라 또한 거의 똑같은 이유에서 자신의 번역본에 대해 '작품 해설'조차 싣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어쨌든 내 나름대로 세워 놓은 이런 책읽기 방식 또한 달리 생각해 보면 내 나름대로 고수하고 싶은 하나의 '책읽기 순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결코 나만의 독창적인 기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언젠가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발견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이토록 고집할 이유까지는 없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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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방자, 꾸미는 자, 모조자, 맹목적인 모방자들은 예술을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참된 작품을 보면, 마음에 들거나 효과가 뚜렷한 점에만 관심을 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여 개념으로서, 즉 추상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교활한 생각을 품고 모방한다. 그들은 기생 식물처럼 타인의 작품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해파리처럼 그 양분의 색깔을 갖는다. 비유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끌어 넣은 것을 잘게 깨어 혼합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화할 수 없는 기계와 같다. 따라서 그 혼합물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성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거기에서 가려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천재는 유기체처럼 동화하고 변화하고 생산한다. 왜냐하면 천재도 선배나 그 작품에 의해 계발되고 교화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게 직접 직관적인 것의 인상에 의해 예술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생활과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양이 높아도 천재의 독창성엔 지장을 주지 않는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기교를 부린 작품에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2,3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즉 유행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근거는 이 유행의 개념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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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에 쇼펜하우어까지 내세운 마당이니 여기서 니체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그리 나쁘진 않을 듯싶다. 니체의 작품들 가운데 제법 많은 작품들이 '음악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니체 스스로도 밝힌 적이 있었다. 음악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던 쿤데라가 이 점을 놓쳤을 리 없다. 그는 니체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여섯 권의 책(『여명』,『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 지식』,『선과 악을 넘어서』,『도덕의 계보』,『우상들의 황혼』)에서 '동일한 구성적 원형을 추구하고 전개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고 다듬는 모습'을 포착한다. 그와 더불어 그는 '니체 철학'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배신 당하는 현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역사가들이나 대학교수들은 니체 철학을 해설하면서 그의 철학을 축소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의 철학을 그의 철학과 정반대되는 것, 즉 하나의 체계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변형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이 체계화된 니체 속에도, 여성들에 관한, 독일인에 관한, 유럽에 관한, 비제에 관한, 괴테에 관한, 위고 키치에 관한, 아리스토파네스에 관한, 스타일의 경박성에 관한, 권태에 관한, 유희에 관한, 번역에 관한, 복종 정신에 관한, 타자 소유와 이 소유의 모든 심리적 전형들에 관한, 학자들과 그들 정신의 한계에 관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Schauspieler(코미디언들)에 관한 니체의 성찰들이 들어설 여지가 있을까? 보기 드문 몇몇 소설가들에게서가 아니면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수한 심리적 관찰들을 위한 자리가 과연 있을까?
쿤데라가 자신의 대표작『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화두로 꺼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니체의 책들을 미리 읽지 않았던 독자들은 『배신당한 유언들』속에 나오는 쿤데라의 짧은 문장 속에 가득 담긴 '니체의 성찰들'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니체의 책들을 미리 읽은 독자들이라면 쿤데라의 남다른 성찰에 대해 놀라워하며 니체의 작품들에 담겼던 여러 문장들을 새삼스레 떠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이런 대목들이야말로 '책을 읽는 순서'가 결정적으로 문제시되는 생생한 현장이 아닐까.
소설가가 들려주는 '소설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들'을 읽고 나니 내가 그동안 읽어 온 책들이 얼마나 협소한 범위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광범위한 책읽기가 선행되어야 하는지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언급된 책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율리시스』는 여전히 '때'가 아니라 여기고 독서를 미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율리시스』를 읽기 전에『젊은 예술가의 초상』부터 '먼저' 읽으라는 어느 대가의 충고는 거역하기가 힘들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을 적어도 서너 권쯤 읽고 나면 틀림없이 나도『율리시스』에 덤벼들 날이 오리라 믿고 있다.
-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언급된 책들 가운데 내가 지닌 책들. 이 가운데 몇몇 책들은 여전히 읽지 않았다.
책읽기에 대해 '순서'를 강조하는 얘기는 내가 과문한 탓인지 여태껏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책읽기에 대한 책'을 별로 읽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책에 대한 전문가들이 생각하기로) 책읽기의 '순서'를 언급하는 일은 고작 '풋내기들이나 꺼낼 만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그 자체로 너무 어리석은 일이어서 별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책을 아주 많이 읽은 몽테뉴는 이런 말까지 남겼다.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 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두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주석하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런 하찮은 글을 장황하게 끄적거리고 있는 내게 위안을 주는 사람을 내가 전혀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니다.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이 했던 다음 말은 여전히 내 머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나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88∼89쪽)
-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중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책이 그 책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또다른 읽지 않은 책들'을 거슬러 따라 올라가는 출입구 같은 역할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이런 '순서'는 누구라도 흔히 경험하게 되는 독서법이다. 그런데 캠벨은 다른 책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따라하기 힘든 제안'까지도 우리 앞에 내놓는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190쪽)
- 조지프 캠벨, 『신화의 힘』중에서
비록 우리 모두가 캠벨의 지침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지만 얼마쯤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노력해 볼 수는 있지 싶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일은『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언급된 무수한 책의 리스트를 직접 한 번 작성해 보는 일이다. 이런 사소한 일이 결국은 '다음'에 읽을 책들을 미리 살피는 '또하나의 순서'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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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시간에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행운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필요하다
기다리는 자의 문제. ㅡ 어떤 문제의 해결점이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보다 높은 인간이 그래도 적절한 시간에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ㅡ 말하자면 '분출하기 위해서는' 행운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보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구석에는 앉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그러나 기다려도 헛되다는 사실을 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또한 그들을 깨우는 고함소리가,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저 우연이 너무 늦게 다가온다. ㅡ 그때는 조용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행동하기 위한 최상의 청춘과 힘을 이미 다 써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가 '벌떡 일어섰을' 때, 사지가 마비되고 정신이 이미 너무 무거워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놀랐던 것일까! "너무 늦었다" ㅡ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는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이제 영원히 쓸모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7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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