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내일이면 동유럽으로...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키케로) 나는 그들의 용모와 자세와 의복을 고찰해 보기가 재미난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내 입에 올려 보며, 그것을 내 귀에 울려 오게 한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면 이런 위대한 이름들 앞에 일어선다."(세네카)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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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 공연을 보고 왔다. 연주 프로그램은 1부가 베토벤 교향곡 2번이었고 2부가 베토벤 교향곡 3번이었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연주 내내 포디엠에 선 정명훈 지휘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지휘'가 돋보였다. 유려하고도 풍부한 표현을 맘껏 뽐낸 오케스트라의 현악기들도 정말 좋았고, 플룻과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등등 관악 파트도 흠잡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팀파니는 관현악과 완전히 하나가 된 듯 놀라운 일체감과 몰입을 이끌어 주었다. 그만큼 정명훈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찰떡 궁합이었다. 또한 베토벤이 467년 전통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는가를 새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들의 연주에 대한 놀라운 반응들과 벅찬 감동은 인터넷 공간을 조금만 다녀 봐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쯤에서 슬쩍 내 이야기의 무대를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의 주무대인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훌쩍 옮겨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나 무슨 이야기를 할 때면 '장소'가 주는 느낌만큼 우리에게 직접 강렬하게 호소하는 것도 드물지 싶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악을 어떻게 드레스덴과 따로 떼어 놓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 작년 여름, 우리 일행 넷이 뮌헨에 도착한 후 자동차를 빌려 타고 뉘른베르크와 라이프찌히를 빠른 속도로 둘러보고 난 뒤에 서둘러 도착한 곳이 바로 '옛 작센 공국의 수도'로 명성이 높았던 도시 드레스덴이었다. 7월 초순이어서 그런지 늦은 오후인데도 햇살은 몹시 강렬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 엘브플로렌츠 드레스덴'은 호텔 로비가 아주 인상적이었고 전체적으로 꽤나 한적하면서도 직원들은 친절했고 시설은 비교적 훌륭했다.
- '음악'으로 명성이 드높은 도시여서 그런지 호텔 로비에도 그랜드 피아노가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 우리는 드레스덴에서 고작 '1박 2일'에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음날엔 베를린으로 가야 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나서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타고 '츠빙거 궁전'으로 곧장 이동했다.
이곳에는 루벤스 등 유명한 거장들의 명화가 소장되어 있다고 하나 우린 바빠서 궁전 외관만 보는 데 그쳤다.
- 궁전을 통과해서 엘베강 쪽으로 나오면 '극장 광장'이 나온다.
광장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 가운데 왼쪽 건물은 대성당(카테드랄)이고 오른쪽은 드레스덴 성이다.
- 이 모든 건축물들이 1945년 2월에 그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으로 모조리 폭삭 주저앉았을 텐데 언제 어떻게 이렇게 번듯하게 다시 되살려 놓았을까 몹시 궁금하다.
- 혼자 건축물들을 둘러 보며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함께 온 일행 셋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홀로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드레스덴의 일상'을 잠시나마 엿봤다.
- 이 건물이 바로 드레스덴 음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드레스덴 젬퍼 오퍼'이다.
1841년 엘베 강 유역의 중심가인 극장 광장에 건립되어 도시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아쉽게도 이 유명한 건물의 '전경'을 미처 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건물이 '젬퍼 오퍼'인 줄도 몰랐다.)
- '젬퍼 오퍼' 건물의 측면. 1838∼1841년 건축가인 젬퍼가 건축하였는데 훗날 모두 불타버렸고 그의 아들이 재건했다고.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탄호이저》, R.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등 수많은 명작이 바로 이곳에서 초연되었다고 한다.
- 사실 우리 일행은 '드레스덴 젬퍼 오퍼'를 찾기 위해 꽤나 여러 시간 동안 헤맸다. 우리는 '젬퍼 오페라 하우스'를 코앞에 두고도 몇 번씩이나 애써 그 건물을 외면하는 실수를 반복했다. 혹시나 다른 곳에 '진짜 젬퍼 오퍼'가 있을 줄 알고 더 찾아 헤맸던 것이다. 우리는 '극장 광장'을 벗어나 저 멀리 '성모 교회(Frauenkirche)'까지 걸어 갔다가 다시 '극장 광장'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성모 교회' 근처엔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봐도 '젬퍼 오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젬퍼 오퍼' 근처로 되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건물이 '젬퍼 오퍼'라는 사실을 끝끝내 확신하지 못했다. '분명 이 건물이 젬퍼 오페라 하우스가 맞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우린 다시 '성모 교회'가 있는 '노이마르크트 광장'으로 되돌아 걸어 갔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을 걷고 헤매는 바람에 우린 몹시 지치고 배가 고파 더이상 걸을 힘도 없었다. 점심은 커녕 음료수 한 잔도 마실 생각을 못했다. 우리는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노천 카페' 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만 코가 빠지도록 기다렸다. 이때 먹었던 이탈리안 스파게티와 독일 맥주가 어찌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다.
-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갈증은 독일 밀맥주를 거푸 주문해서 가라앉히고 나니 그때 겨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오후 8시 35분을 가리키는데도 해는 아직 창창하다. 드레스덴의 위도(북위 51° 3′) 때문이었다.
- 드레스덴은 '야경'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밤 10시는 지나야 야경을 볼 수 있을 듯하다.
- '성모 교회'의 시계는 저녁 9시를 넘기고 있는데도 아직 '저녁 햇살'이 건물 위쪽을 여전히 비추고 있다.
-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독일 맥주'를 종류별로 두루 맛볼 정도로 오래 죽치고 앉아서 마냥 쉬었다.
- 땅거미가 밀려오면서 차츰 주위가 서서히 어둡기 시작하자 우리 일행은 '브륄의 테라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에 아주 멋진 '오페라 아리아 길거리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동전을 두둑히 쏟아 넣고 기념촬영까지 했다.
-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엘베 강변의 테라스 '브륄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엘베 강의 야경.
현지 시각으로는 밤 10 정각이었는데도 방금 해가 진 듯한 모습이다.
- '브륄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대성당(카테드랄) 쪽 야경(사진의 오른편이 엘베 강변)
-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젬퍼 오페라 하우스'가 이 야경 사진에 비로소 오롯이 담겼다.
저 멀리 오른쪽에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건물이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 엘베 강변에서 츠빙거 궁전 동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기마 동상'이 있는 극장 광장엔 인적이 뜸하다.
사진 오른쪽 끝에 일부만 담긴 건물이 '젬퍼 오페라 하우스'이다.
이제 다시 내 얘기를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옮겨야 할 때다. 어쩌면 지금 내가 너무 지나치리만큼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도 달리 있는게 아니지 싶다. 그건 바로 '음악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쓰는 일이 몹시 어렵게 느껴지고 약간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곧바로 목표를 향해 돌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니 괜스레 변죽만 잔뜩 울리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이왕 내친 마당이니 음악에는 아직까지도 어두운 눈과 귀를 가진 내가 속절없이 다소 어줍잖은 얘기를 늘어놓더라도 귀밝고 눈밝은 독자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슬쩍 눈감아 주기를 미리부터 주제넘게 청탁을 넣고 나서 내 이야기를 마저 이어갈까 싶다.
먼저 1부에 연주되었던 '베토벤 교향곡 2번' 부터 시작하자. 사실 베토벤 교향곡들은 홀수로 된 작품들이 너무 유명하고도 두드러진 탓에 짝수 교향곡들은 '6번 전원교향곡'을 빼고는 자주 들을 기회가 드물다. 나 또한 이번 연주를 예약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교향곡 3번 연주'는 늘 마치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것처럼 반가웠지만 '2번 연주'는 '아직은 나에겐 낯선 작품인데.... 어쩌나...'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엔 공연을 보러 가기 전부터 아예 작정을 하고 '교향곡 2번'을 집중적으로 미리 들어보기로 했다. 따로 구입해 놓은 음반이 없어도 좋았다. 유튜브만 열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찾은 보물이 바로 '다니엘 바렌보임'이 2012년에 로열 앨버트 홀에서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실황 앨범이었다. 나는 왜 이토록 훌륭한 실황 연주를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영상을 보고 들으며 나는 '교향곡 2번'에 완전히 푹 빠져 지냈다. 요 며칠간 '바렌보임의 2번 교향곡'만 열 번 이상은 들었던 듯하다. 물론 3번, 5번, 7번, 9번도 빼놓지 않고 마저 들었다. 바렌보임의 지휘는 그만큼 흡인력이 강했다. 그리고 '2번 교향곡'에 대해서는 다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영상까지 두루 찾아 서로 비교하며 들을 기회도 가졌다.
'베토벤 교향곡 2번' 공연을 위해 내가 찾아본 영상은 2012년부터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를 이끌고 있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빈 필 연주와 마리스 얀손스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연주였다.
이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분명 세계 최고 수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유독 다니엘 바렌보임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연주만이 가슴에 너무나 직접 와 닿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바렌보임의 지휘 모습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지만 젊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생기발랄하면서도 거리낌없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연주 모습 자체가 '베토벤 교향곡 2번'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베토벤 교향곡 2번'은 그가 청력을 잃기 시작하면서 극도의 상심을 겪은 끝에 마침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자살을 결심할 만큼 삶의 깊은 고통을 겪은 이후에 다시금 자신을 추스려 일으켜 세운 끝에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예술혼'을 활활 불태우기 시작하면서 열정적으로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교향곡을 들으면 '유서'를 쓸 만큼 깊은 실의에 빠졌던 예술가의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삶에 대한 의욕과 환희'가 네 악장 여기 저기에 가득 넘쳐나는 점이 가장 놀랍다. 너무나 밝고 생기있고 익살스럽고 재치가 넘치고 조화롭고 감미로워서 '2번 교향곡' 이후에 베토벤이 쏟아낸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위대한' 걸작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생동하듯 약동하는 젊은 분위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곡이다. 베토벤이 이처럼 위트 넘치고 유쾌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 맞는가 싶고 또한 그의 내면이 이토록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데서부터 어떻게 그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쪽으로 빠르게 나아갔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색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이 작품의 작곡 연도가 1802년이니 과연 '베토벤의 싱그럽고도 꿈많은 푸른 시절'을 한껏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조금도 없지 싶다.
사실 나는 몇 년 전에도 '베토벤 교향곡 2번과 3번'으로만 채워진 공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물론 공연 전에 미리 연주될 '두 작품'을 두어 번쯤 듣고 갔음에 틀림없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몰라도 도무지 베토벤의 2번 교향곡이 내 마음에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그 여파였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 2부에 연주되었던 '3번 교향곡'마저 제대로 몰입이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을 정도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2012년 11월 20일이었으니 정확히 3년 전의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과 부단한 예습(?)을 통해 이번 드레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베토벤 교향곡 2번' 연주를 손꼽아 기다려 왔으니 내가 생각해도 이번 연주는 '대실망' 아니면 '대만족' 그 어느 쪽으로든 판가름이 분명하게 날 터였다. 아... 그런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분위기가 제대로 잡혔다. 글쎄,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들이 연주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객석에서 먼저 튀어나왔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조율을 마치고 나서 곧이어 정명훈 지휘자가 등장하는데 객석 여기저기서 '열렬한 환호성'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그에겐 분명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엄청난 힘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지휘대에 올라선 그는 예전에 봤던 모습과는 어딘가 달라진 듯했다. 몸짓과 손짓 하나하나가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 넘쳐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서의 자부심도 분명 있었을 테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 호흡을 맞춰온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가 연주할 곡이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2번'이었던 만큼 그도 마치 베토벤처럼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금 '생기발랄하고 유쾌하고 즐겁고 힘찬' 연주 속으로 완벽하게 다시금 몰입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으리라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예술가로서 한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그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말고 달리 그가 자신을 더 훌륭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는 완벽하게 자신을 최고의 모습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엄청난 연주와 함께 말이다.
그의 이날 지휘에는 여태껏 내가 예술의 전당에서 직접 봤던 다른 어떤 지휘자에게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혼신을 다하는 듯한 절절한 에너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그의 이번 연주 성공은 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오랜 전통과 드높은 자부심과 훌륭한 연주'가 단단한 바탕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을 갈고 닦고 서로 호흡을 맞춰야만 이토록 놀라운 경지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그들은 유감없이 보여주고 들려줬다. 베토벤이 이 오케스트라를 두고 왜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극찬했던가를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는 무대였다고 여겨도 좋겠다 싶었다. 그만큼 대단한 연주였고 관객들도 연주가 끝나자 '브라보'를 연발하면서 뜨거운 박수로 열렬한 호응을 보여줬다. 나 또한 4악장 후반부로 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끝내 마구 쿵쾅거려서 그 흥분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4악장이 끝나자말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벅찬 감동을 쏟아내듯 '브라보'를 외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2부에 연주된 '교향곡 3번 영웅'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너무나 유명해서 내 이야기를 짧게 마무리지어야 옳지 싶다. 그 힘차고 웅장하게 휘몰아치는 드센 폭풍같은 격정적인 울림들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일명 '에로이카'로 불리는 이 교향곡은 베토벤이 '2번 교향곡'을 만든 다음에 뒤이어 작곡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곡가 자신에게도 '영웅적인 작품'이 되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너무 식상할 정도로 진부한 얘기로 들린다. 사실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 보노라면 '영웅'의 호칭이 붙어 마땅할 인물들 가운데 '나폴레옹'은 어쩌면 너무 왜소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든 그는 유럽을 호령한 '전쟁 영웅'임에는 틀림없지만 스스로 자신을 '황제'라고 칭한 이후부터 급속한 몰락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베토벤조차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황제 나폴레옹'에 대실망하여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란 이름을 단칼에 지워버리고 그저 '신포니아 에로이카 – 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해' 라고 새로이 이름을 부여했겠는가.
나는 이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참된 영웅들은 어떤 인물들일까를 곰곰 생각해 볼 때가 더러 있다. 내가 책들을 통해서 만났던 호메로스를 비롯한 위대한 고대 시인들과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여러 철학자들,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와 미술가와 음악가들, 그리고 다윈이나 뉴튼과 같은 과학자들이 진정한 인류의 영웅들이지 않을까. 나폴레옹처럼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중들을 싸움터로 내몬 전쟁 영웅 말고 말이다.
나는 이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힘찬 기운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찬 '영웅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영웅들의 씩씩하고 용감했던 걸음걸이'를 하나씩 떠올리면서 기분이 한껏 부풀어오르는 걸 자주 느낀다. 그리고 3악장과 4악장에서 느껴지는 '영웅이 열어젖힌 또는 열어젖힐 밝은 미래'가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의 밝은 미래'와도 희미하게나마 연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욕심마저 품을 때도 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밝은 미래가 틀림없이 다가오리라는 그런 '굳건한 희망'보다 우리의 기운을 샘솟게 하는 게 달리 무엇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번에 정명훈의 지휘로 듣게 된 3번 교향곡 중에서도 특히 2악장을 들으며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원래 '장송 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2악장은 당연히 장엄하고도 숙연한 느낌이 충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느낌이 너무 슬픔과 애도만으로 가득한 분위기는 아니다. 더구나 '영웅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비탄도 아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영웅 교향곡의 2악장'은 '영웅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의 거대한 발자취와 업적'을 생각나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차라리 슬프기보다는 '저멀리 아득히 멀어지면서 사라져가는 거인의 뒷모습'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치게 되는 마지막 한 순간까지 붙잡으려 애쓰며 '응시'하는 거대한 추모객들의 눈길이 연상된다.
이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3번 교향곡 2악장 연주는 지휘자 정명훈이 '유난히 느린 템포로 이끌어낸' 덕분에 더욱 놀랍고도 매혹적으로 다가온 듯했다. 애잔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끝내 긴 침묵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운을 멋지게 표현해낸 현악 파트와 팀파니의 잔잔한 울림이 정말 놀라웠고 베토벤의 선율에 따라 고요히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데 성공한 듯한 관객들의 숙연한 고요도 몹시 감동적이었다. 나는 2악장의 중반을 넘어갈 때부터 음악에 완전히 몰입되어 가볍게 눈물이 고일 만큼 특별한 감동을 받았는데 '이럴 땐 눈물을 좀 흘려도 좋지 않을까. 아니 이대로 펑펑 좀 소리내어 속시원히 울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마저 아주 잠깐 동안 들었었다.
베토벤의 2번 교향곡과 3번 교향곡 모두 흠잡을 데 없는 명연주를 마치고 나서 관객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지자 정명훈 지휘자도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앙코르 연주곡이 무얼까 몹시 궁금했는데 지휘자가 친절히 곡명을 알려주었다. '베토벤을 연주한 이후에는 앙코르를 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베토벤 이후엔 여전히 베토벤밖에 없다'면서 '7번 교향곡 4악장'을 들려주겠단다.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짧게 쏟아진 이후 주체하기 힘들다는 듯이 곧바로 질풍과도 같이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호쾌한 연주가 이어졌다.
지휘자가 너무 흥분한 탓에 템포를 지나치게 빠르게 가져가는 바람에 아주 약간씩 흔들리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으나 베토벤 7번 4악장 연주 또한 이날 연주의 격한 감동을 배가시키기엔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언젠가 이들이 베토벤 교향곡 7번을 들고 다시 한국을 찾아준다면 그땐 기필코 그들의 연주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성급한 생각마저 들었다. 혹여 언젠가 내가 다시 드레스덴을 찾아갈 날이 온다면 그땐 꼭 '드레스덴 젬퍼 오퍼'를 똑바로 찾아가 직접 이들의 연주를 다시 만나보고 싶은 거창한 욕심마저 들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이라면 아무래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빼놓기 어렵다.)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나니 새삼 베토벤을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올해 봄에 난생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들렀을 때 우리 일행이 무리하게 시간을 할애하여 기어코 빈 외곽에 자리잡은 '그의 무덤'을 애써 찾아가 직접 헌화한 일은 지금 생각해 봐도 여간 잘한 일이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다. 이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 연주를 직접 듣기 위해 비싼 티켓값을 지불한 일은 이제 명백히 잘한 일이 되었다. 만약에라도 내가 이 공연을 그냥 스윽 지나쳤더라면 작년 여름에 드레스덴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젬퍼 오퍼'를 찾아 헤맸던 시간들을 사진과 글로 엮어서 이렇게 남길 일도 결코 없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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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음악가들인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가 바로 여기에 묻혀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의 무덤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일인데, 그토록 위대한 음악가들이 여기 한자리에 다 모여 있었다.
빈을 방문한 각국 여행자들이 저마다 꽃다발을 들고 이 공동묘지를 찾는 이유를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 ‘음악가들’ 묘역의 중심에는 모차르트가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무덤은 실제 무덤이 아닌 기념비다.
모차르트 기념비 뒤 양쪽으로는 그를 흠모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슈베르트는 아예 “죽으면 모차르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베토벤의 계승자' 브람스의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 아래 사진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무덤 뒤쪽엔 <라데츠키 행진곡>을 쓴 그의 부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역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요제프 등 음악가 형제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경기병 서곡>의 프란츠 폰 주페, 지휘자인 요한 헤르베크의 묘도 발견할 수 있다고.
작곡가 쇤베르크와 체르니도,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건축가 아돌프 로스도 이곳에 묻혀 있다고...
- 이곳이 바로 베토벤(1770∼1827)의 묘.
그는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17세 때 빈으로 건너가 빈의 사교계에서 환영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뒤 난청에 시달리다가 악화되자 빈 외곽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 적도 있다.
요양을 위해 바덴 등 빈 교외의 온천 휴양지에 머무른 적도 많았고, 구시가에서도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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