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찰스 다윈과 앙리 베르그송의 생각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홉스의 '야만인'과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도 함께 떠오른다.)

스스로 '때로는 삼류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소로우는 하버드 대학교의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교사-개인 가정교사, 측량사-정원사, 농부-페인트공, 목수, 벽돌공, 일용 노동자, 연필 제조공, 사포 제조공, 작가, 때로는 삼류시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그가 찰스 다윈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이 내겐 몹시 흥미롭다.

『월든』이 출간된 1854년까지만 하더라도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출간)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로우는 다윈의 첫 작품인 『비글호 항해기』는 무척 감명깊게 읽었던 듯하다. 그런 흔적이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는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듬해인 1860년 1월에 다윈의 주저를 읽었다고 한다. 1860년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해였고, '노예제도'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낸 그가 죽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다윈의『종의 기원』을 읽고 난 느낌들을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깝다. 

소로우의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뿐만 아니라 그의 막힘없는 생각들과 드넓은 안목에 비춰보면, 소로우는 이미 '다윈의 생각'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다윈의『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어느 탁월한 자연과학자의 '당연한 귀결'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내 주제넘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소로우 또한 뛰어난 자연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다윈의 그 책에 대해 반응했던, 그리 대수롭지는 않다는 식의 '딱 그만큼'에 가까운 호의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 * *


 

 

동물적 속성

우리는 내면에 동물적 속성이 감춰져 있어, 고결한 본성이 잠들 때 그 속성이 깨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동물적 속성은 파충동물처럼 비열하고 도덕적으로 방종하며, 결코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인 듯하다. 말하자면, 동물적 속성은 건강한 삶을 살아갈 때도 우리 몸에서 기생하는 벌레와도 같다. 우리가 그런 동물적 속성을 멀리할 수는 있지만 속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동물적 속성이 고유한 활력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더라도 순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 맹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지극히 사소한 부분 때문이다. 범인은 그 차이를 금세 잃어버리나 군자는 그 차이를 조심스레 유지한다."39 우리가 순수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에게 순수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욕망을 억제하고 몸의 외적인 감각을 억제하는 힘과 좋은 행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력만으로 잠시나마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지배해서, 천박한 감각에 따르는 형태를 띤 것을 순수하고 경건한 것으로 바꿔갈 수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나태할 때 생산적인 에너지는 헛되이 낭비되며 우리를 불결하게 만들지만, 절제할 때는 그 에너지가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영감을 준다. 순결은 인간성을 꽃피우기 위한 조건이다. 천재적 재능, 영웅적 자질, 신성함 등은 모두 순결의 결과로 얻는 다양한 열매에 불과하다. 인간은 순수의 항로가 열릴 때 하느님에게 곧장 다가갈 수 있다. 순수한 행실은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불순한 행실은 우리를 낙담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다. 우리 삶은 이러한 부침의 반복이다. 내면에서 동물적 속성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반면 신성한 면은 굳건해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의 열등하고 동물적인 속성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파우누스와 사티로스41처럼 신이나 반신반인半神半人, 즉 신성과 수성이 결합된 존재고 탐욕으로 가득한 피조물일까 봐 두렵다. 또한 우리 삶 자체가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300∼302쪽)


주석

39. 포티에의 프랑스어 번역판 『공자와 맹자』에서 「맹자」부분을 소로가 직접 번역해 인용한 것이다.

41. 파우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사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양半人半羊으로 숲과 산을 지배하는 신이며, 탐욕스럽고 주색을 즐긴다.

 

 

 

도덕 감각

도덕 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그외의 다른 모든 척추동물들이 동일한 보편적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고, 왜 그들의 배발생 초기 단계가 모두 동일하며, 또 왜 그들이 특정한 흔적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들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어떠한 견해가 있더라도 우리 자신과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놓은 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전체 동물 계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동물의 인척 관계와 분류, 그리고 지리적 분포와 지질학적 계통에서 얻은 증거들을 다 함께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론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선천적인 편견이며 우리의 조상이 반신반인에서 유래되었다고 선언하는 오만불손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여러 포유동물의 비교해부학과 발생 과정에 박식했던 박물학자들이 각각의 생물을 독자적인 창조 활동의 작품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다.(70∼71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1장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 中에서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

이 작품에서 도달한 주요 결론, 즉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개인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야생의 황폐한 해안에서 처음으로 푸에고 제도 원주민 무리를 보고 느꼈던 그 경악스러움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내 마음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고 온몸에는 얼룩덜룩 칠을 한 채였다. 그들의 긴 머리털은 헝클어진 채였고 흥분하여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그들의 표정은 거칠고 놀라움과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먹고 살았다. 정부도 없었고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구성원이 아니면 누구에게나 무자비했다. 토착지의 미개인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혈관 속에 비천한 생물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큰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적을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엄청난 희생을 바치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아를 살해하고 아내를 노예처럼 취급하며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고 천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미개인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무서운 적에게 당당히 맞섰던 영웅적인 작은 원숭이나 산에서 내려와 사나운 개에게서 자신의 어린 동료를 구해 의기양양하게 사라진 늙은 개코원숭이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란다.

인간은 비록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의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귀한 자질, 가장 비천한 대상에게 느끼는 연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하등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비심, 태양계의 운동과 구성을 통찰하고 있는 존엄한 지성 같은 모든 고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신체 구조 속에는 비천한 기원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571∼572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동물과 식물

"우리는 동물을 감수성과 깨어난 의식으로, 식물을 잠든 의식과 무감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다른 한편 동물계의 진화는 식물적 삶에 보존되어 있는 경향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거나 멈추거나 아니면 뒤로 돌아가기도 한다. 실제로 한 동물 종의 활동이 아무리 충만하고 넘치는 것처럼 보여도 마비나 무의식이 언제나 노리고 있다. 동물의 활동은 노력에 의해 피로를 대가로 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 동물이 진화한 길을 따라 수없는 쇠퇴와 퇴락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대부분 기생적 습관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의 식물적 삶을 향한 방향전환들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

고상한 야만인의 학설은 새로운 진화적 사고에 의해 그 오류가 더욱 무자비하게 노출된다. 자연 선택의 산물 중에는 그야말로 고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다음 세대의 발현을 위한 유전자들의 경쟁 속에서 고상한 것들은 도태되기 때문이다. 두 동물이 한 물고기를 먹을 수 없고 같은 짝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위한 투쟁은 모든 생명체에 편재한다. 사회적 동기가 자신의 복제를 최대화하려는 유전자들의 적응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투쟁에서 경쟁자들을 이기도록 설계되어야 하는데, 이기는 방법에는 경쟁을 중화시키는 방법도 포함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화려한 표현에 따르면,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도살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자들의 직계 후손인 우리는, 아무리 평화로운 미덕을 소유했을지라도 여전히 어느 한 순간에 화염처럼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학살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휘둘렀던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이다."
 (112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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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2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누구의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글을 접하면 신기해서 한 번 더 읽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에겐 똑같이 위대하게 생각되는 저술가라도 그 당시엔 혹평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

oren 2013-12-20 10:09   좋아요 0 | URL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들의 계보'처럼, 수많은 책들 속에서 '누구는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서로 주고받은 영향들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경우가 참 많은 듯해요.

소로우 또한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출판했던 첫 작품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이후, 9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끝에 『월든』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내놓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듯해요. 물론 작가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세상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했던 듯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