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기 뭐 볼끼 있다고 가니껴?

당신은 물었지

볼 것이 없어서 간다오


예전에 언젠가 hnine님께서 올려주신 '화암사 가는 길'이라는 시 가운데 일부를 다시 떠올려 본다.

누구나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볼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특히나 해가 바뀔 즈음엔 그냥 집안에 틀어박힌 채 '새해'를 맞이한다는 게 몹시 답답하고 억울한 기분까지 들 때가 있다. 가는 해를 아쉬워 하고 또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할 즈음 급작스레 고조되는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내면의 욕구'는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나의 경우, 예전에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을 참 많이 찾아 다녔던 것 같다. 특히 한 해가 저무는 연말이나 새해 첫날에 한겨울의 세찬 바람을 맞아가며 높은 산을 오를 때 자연스레 찾아오기 마련인 힘겨운 느낌들은 뭔가 스스로 '반성'의 의식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와 아주 잘 결합한다. 그러고 보니, 가끔씩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 올라 어금니를 힘차게 꽉 물어가면서 '지나간 한 해' 동안에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 나쁜 습관을 떠올리고, 또 '새해에 이뤄야 할 목표들'을 새롭게 다짐했던 순간들도 떠오른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런 연말연시의 다짐들이 생각보다 제법 유용하다는 것이다. 잠시 일상을 벗어나 고요히 '흘러간 시간들과 다가올 시간들'을 함께 떠올려 보면서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을 그 '세월의 흐름'이 배경을 이루는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보는 시간은, 그것이 비록 형식상으로는 홀로 꾸며낸 연극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늘 '일상성의 애매함' 속에 빠져 지내면서 좀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살펴보지 못한 나 자신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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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다른 분의 서재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일이지만(수단에 노트, 펜 보내기... ) 아프리카의 수단으로 보낼 '다이어리와 수첩들'을 좀 더 챙기려는 도중에, 내가 20년쯤 전에 적어둔 '연말연시의 어떤 흔적들'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도대체 일기를 쓰지 않다가도 '새해 첫날'에는 그래도 어쨌든 일기를 꼭꼭 쓰려고 애썼던 모습도 보이고, 새해의 결심들이 그냥 무위로 그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1991년엔 정말 술을 많이 마셨나 보다. 온통 술얘기 밖에 안 보인다.)


(이맘땐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 시기여서 책에 대한 얘기는 아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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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이가 점점 들수록 추위에 맞서 칼바람 쌩쌩 부는 겨울산을 오르는 일도 다소 버겁게 느껴진다. 그럴 때 등산을 대신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나에겐 '동해바다로 가는 일'이다. 군대생활 3년 동안을 꼬박 동해안 바닷가에서 근무했던 나로서는 그쪽 방면이 꼭 유쾌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턱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동해의 푸른 바다와 그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7번 국도를 오르내리는 게 좋다. 기분이 제법 좋을 땐 그곳 동해안의 이곳 저곳이 마치 '아늑한 고향'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곤 할 때조차 있다.
 
해마다 여러차례 찾았던 동해안이지만 이번 연말에 찾은 동해안 바닷가는 유난히도 춥고 바다는 제법 거칠었다. 거센 파도를 담아 내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봤지만 워낙 추운 날씨여서 자동차 속으로 몸을 피신하기 바빴다. 더군다나 권금성의 케이블카는 강풍 탓에 아예 운행을 중단하였고, 백담사 가는 길도 온통 눈으로 얼어붙어 '운행 중지'였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강추위에 떨며 담아온 사진들'을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 보니 대략 난감하다. '그기 뭐 볼끼 있다고' 사진을 이리 찍었나 싶다. 그냥 묵히고 버리자니 왠지 조금 아깝기도 하고, 새해 첫날에 담았던 '호수공원의 겨울 풍경'도 몇 장 있고 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구실로 사진을 올려본다. 그래도 '볼끼 너무 없다' 싶은 분들을 위해 동영상도 덧붙여 보았다. 동해 겨울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 동안 미처 이루지 못했던 여러 아쉬움들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 * *

그런데 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그기 뭐 볼끼 있다고' 라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되는 걸까?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인간의 모든 관찰과 행위와 체험 등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나이를 먹을수록 희박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충분한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청년시절뿐이며, 노년기가 되면 의식적인 생활의 절반은 잃어버린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생존의식은 나이를 먹을수록 희미해진다. 마치 아무리 훌륭한 미술품이라도 몇천 번이나 보는 동안에 감흥이 점점 없어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모든 사물은 차츰 의식의 표면을 스쳐갈 뿐 별로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눈앞에 닥친 필요에 따라 움직일 뿐 나중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따라서 의식이 감퇴함에 따라 세월도 빨리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유년시절에는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과 사건이 신기하기만 하여 모조리 의식 속에 떠오르므로, 하루가 매우 길게 생각된다. 이와 비슷한 일을 여행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난 후 한 달 동안은 가정생활의 넉달 동안보다 더 길게 생각되지만, 같은 사물을 몇 번씩 자주 대하는 동안에 차츰 지적인 능력이 둔해지므로 모든 사물들이 머릿속에 별로 인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가며, 생활도 점점 무의미하게 되고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진다. 흔히 노인들의 하루가 아이들의 한 시간보다도 더 짧게 생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 * * *


1. 새햐얀 눈으로 뒤덮인 강원도 설악산, 한계령 부근

Shooting Date/Time 2012-12-30 오후 3:14:32


2. 흰 눈을 닮은 자작나무





3. 설악산 십이선녀탕 가는 길
 





4. 겨울강, 바람이 전하는 말
 

Shooting Date/Time 2012-12-30 오후 3:40:14


 

5. 겨울 바다, 거친 파도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전 11:58:51


 

6. 자주 찾는 바닷가, 광나루(남애항과 인구해수욕장 사이)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12:08:33

 

 

7. 바다풍경횟집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1:35:51

 


8. 갈매기의 꿈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1:41:33

 


9. 거친 바다, 거센 파도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1:44:58

 


10. 동해안을 떠나며......  2012년의 마지막 햇살이 비치는 미시령 울산바위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3:25:27

 


11. 2013년 3월 31일까지 운행을 중단한 '백담사 가는 버스정류장'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3:40:54

 

 

 

12. 새해 첫날 풍경

Shooting Date/Time 2013-01-01 오후 1:08:14

 


13. 스키장을 방불케 하는 호수공원





14. 눈덮힌 호수공원
 


Shooting Date/Time 2013-01-01 오후 1:34:12


15. 붉게 빛나는 산수유 열매

Shooting Date/Time 2013-01-01 오후 1:36:06

 


16. 눈썰매장으로 뒤바뀐 호수공원 





17. 신나는 동네꼬마 녀석들

 

 


18.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었던 그곳엔 어느 이름모를 처녀와 '눈사람' 뿐

Shooting Date/Time 2013-01-01 오후 2:41:57


 

* 거친 바다, 거센 파도

 
Shooting Date/Time 2012-12-31 오후 1:44:2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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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이런 분이 또 계셨네요.
뒷북이지만 신선한 충격 먹고 구경하옵니다.
알라딘 고수들은 따라 잡을 수 없는 나의 스승들...
오렌님, 앞으로 많이 배우고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꾸벅^^*

oren 2013-01-03 12:17   좋아요 0 | URL
팜므님 반갑습니다.
팜므님은 가끔씩 다른 분의 서재에서도 여러번 뵈었던 분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네요. ㅎㅎ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리고 저도 팜므님의 서재에 자주 놀러갈께요~

프레이야 2013-01-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지난 시절 다짐을 보며 흐뭇한 웃음이 나는 건 뭐죠! ㅎㅎㅎ
92년 저는 뭘 했던가 되돌아보게 되네요.
술을 꽤 많이 드셨던가 봐요. 이젠 그러시지 않겠지요. 젊을 땐 모르지만 나이 들어가면 몸이 눈치를 채지요.
사진으로 보는 겨울풍경이 참 좋습니다. 자작나무숲이 강원도 어느 숲이 있다는데 그곳에도 가보고 싶어지네요.
연말연시면 새삼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란 친구, 올해에도 하루하루 멋진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oren 2013-01-03 13:27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엔 술마시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요즘엔 주량이 꽤 많이 줄었지만요. ㅎㅎ
프레이야님도 올 한해 좋은 시간들로 가득 채우시길 빌어요~

Jeanne_Hebuterne 2013-01-0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작나무가 날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oren 2013-01-03 13:30   좋아요 0 | URL
몹시도 추운 날씨였지만 자작나무는 그 추위를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어요. 바다위를 날던 갈매기도요.
Jeanne님도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나날들 만드시길 바래요~

페크pek0501 2013-01-0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예요? 벌써 우리의 멤버 두 분은 다녀가신 거에요? 제가 지각생인 거예요? ㅋㅋ~~
저는 사진을 125%로 확대하여 보았는데, 그랬더니 더 멋졌어요.
사진을 보고 느낀 점 : 으음~~ 사진은 (사진 찍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작업의 결과물인 것, 맞구나...

1번 사진. 예쁠 것 없는 아내가 그리운 어느 시인처럼 아름다울 것 없는 평범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낍니다.
2번 사진. 쭉쭉 뻗은 나무에서 생명력이 느껴지고... 그 생명력으로 어느 날 봄나무로 탈바꿈을 하겠지요.
4번 사진. 한 편의 시와 같은 제목, 그리고 한 편의 시와 같은 그림.
9번 사진. 그림을 개인지도 받은 적 있는데, 그때 연필로 파다를 그린 적이 있어요. 다 그린 다음 흰 파도는 지우개로 살짝 지워서 하얗게 만들어 나타냅니다. 이 사진을 보니 문득 연필 스케치가 하고 싶어져요.
12번 사진. 역시 사람이 있는 풍경은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사람이 없는 풍경과 다른 느낌이에요.
17번 사진. 유년시절을 추억케 하고...
18번. 계획된 연출인 듯 멋스럽고요...
영상과 어우러진 파도 소리는 어느 음악보다도 듣기 좋은 음악이 되고...

님 덕분에 좋은 감상을 하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말로만 아니고 마음으로...) ^^

oren 2013-01-03 15:43   좋아요 0 | URL
사진이 별로 볼끼 없을 텐데도 페크님께서 일일이 세세한 촌평까지 남겨주셨네요.ㅎㅎ
동영상에 담긴 파도를 (집에 와서) 다시 봤더니, 하마터면 제가 파도에 휩쓸릴 뻔 했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동영상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함께 담겨서 조금 더 실감이 나셨을 듯해요.

이매지 2013-01-0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이 멋져서 저도 모르게 추천 꾸욱-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oren 2013-01-05 00:00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도 새해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빕니다.^^

순오기 2013-01-0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자작나무!@@
늦었지만 사진 잘 보고 갑니다~ 해피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