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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 상 ㅣ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교고쿠도가 돌아왔다. 작년 봄에 출간된 <우부메의 여름>이 슬금 슬금 입소문이 나면서 충격적인 이 소설을 접했던 독자들이 손꼽아 기다려 왔던 후속작이다.
적지 않은 분량이었던 <우부메의 여름>보다도 두 배 가까이 불어난 양적인 증가 속에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좀처럼 느낄수 없는 기대감에 부풀어 첫장을 넘겼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추리작가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한다면 잠시 고심 할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추리작가가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당장 "애드거 앨런 포"라고 대답할 수 있다.(포에게 '추리작가'라는 무리한 호칭을 붙인다면 말이다.) 그의 <모르그 가의 살인>, <도난 당한 편지>,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그 이외의 비 미스터리 단편들까지, 읽을 때마다 나는 포의 천재성에 감탄 한다. 그는 '전설' 그 자체다.
<망량의 상자> 리뷰에 웬 포 이야기인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우부메의 여름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포의 그림자를 느꼈다. 아니 애드거 앨런 포를 추종하는 작가라면 이미 일본 추리 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가 있잖은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에도가와 란포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포를 지극히 존경하고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작가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는 포의 감성적인 측면에 더 감화를 받은 듯 하다. 초창기의 란포는 <2전 동화>, <D언덕의 살인>, <심리 시험> 등에서 포의 정통파 추리 기법을 전수받은 듯 했으나 후일 그가 성공하고 일가를 이루었던 분야는 결국 이상심리와 기괴한 맛, 소위 '변격 미스터리'에서 였다.
그러나 포는 전체적인 작품의 경향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가 창조한 미스터리 소설 분야에선 적어도 변격 보다는 본격에 가까운 작가였다. 인간의 이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조에서 태어난 것이 미스터리 소설 아니던가. 나는 <우부메의 여름> 초반부에서 세키구치와 토론 하며 양자역학과, 우리가 눈으로 보는것과 보지 않는것의 차이 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교고쿠도의 모습과 <모르그 가의 살인>에서 '나'에게 귀납적 추리의 이론을 설파하는 오거스트 뒤팽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계속해서 언급되는 수많은 요괴들과 기이해 보이는 현상, 불가해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작품을 뒤덮고 있지만,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기괴함에 휘둘리지 않는 굳건한 이성의 토대위에 자리잡고 있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논리와 이성, 기괴함과 호러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듯 하다. 그의 많은 작품을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과문한 나로서는 적당한 통속성을 제거한다면 오늘날 포가 추구하고자 했던 길을 가장 충실히 걷고 있는 작가가 교고쿠 나츠히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교고쿠도 시리즈의 또 다른 재미는 주인공 교고쿠도의 독창적인 주장들이다.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특이하지만 탄탄한 여러 이론들을 주장했던 교고쿠도가 이번에는 '범죄의 동기'에 대해 자신의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그는 '범죄의 동기에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일상에서 범죄를 격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범죄의 진정한 동기는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이 범죄를 저지르게 했던것'이라 말한다. 도리노모(지나가던 집이나 만난 사람에게 재앙을 끼치고 나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마물)가 한 차례 휩쓸고 간 자리에 남는 것이 범죄이며, 누구라도 그러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라는 그의 주장은 사건의 해명과 함께 설득력 있게 입증된다.
<망량의 상자>는 <우부메의 여름>에 비하면 다소 선정적이다. 사건 자체의 엽기성은 좀 너무 나간것 아니냐 싶은 생각이 든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무사히 책을 읽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이다. 당시의 의학과 과학 기술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벌어진다. 이러한 점들은 이 소설의 평가가 크게 엇갈릴 수 있을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바뀌는 시점 속에 얽히고 설킨 사건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작품의 얼개는 대단히 훌륭하다. 구성, 전개,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몰입감 또한 엄청나다. 수준급의 구성과 전개를 보여주고도 결말 부분에서 힘없이 무너져 버리는 작품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끝까지 힘을 보여주는 작가의 능력은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 왔는지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될 수 있을것이다.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진 듯한 갖가지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관계되어 얽혀 들어간 모든 등장인물들은 지독한 인과율의 법칙에 지배당한다. 모든 사건과 모든 인연, 각자의 사연들은 한 뭉치의 실타래에서 풀려 나간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망량에 얽매여 있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 던지지 못한 채 비극에 휩싸인다. 서로 서로가 얽힌 인과의 틀 안에서 망량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머리도 점점 부풀어 오른다. 거대해진 망량은 마침내 어마어마한 지옥도(地獄圖)를 그려낸다.
소설은 시종일관 '상자'에 집중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이다. 그리고 그 '상자' 속에는 '지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