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님은 기억하실 듯도 한데, 나는 사실 '어둠의 혓바닥'이다.
지금은 그렇지만, 보통 가장 욕을 많이 하는 시기인 중고등학교 시절엔 그야말로 모범된 언어생활을 했다. 혼잣말이라도 절대 욕을 하지 않으셨던 부모님 덕인지, 형, 누나도 내가 알기론 최소한 집에서는 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얻어진 언어 습관이었을 것이다. 흔한 "새끼야"라는 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비단결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흐흐.
'욕의 순기능'에 대해 눈을 뜬 것은 20대 중반의 일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라고, 그 이후 나는 '욕'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거의 없어졌고, 종종 일상의 묵은 찌꺼기를 내 뱉는 심정으로 몇마디 읊조리곤 한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무데서나 했다간 부랑아 취급을 받기 십상인 터. 장소와 주위 사람을 고려할 수 밖엔 없다. 물론 'Driving language'로도 제격이다. 나중에 자식들 앞에서는 조심해야 할텐데..
친한 친구 사이라도 심한 욕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친구가 있다. 내게 있어서 그 기준은 친밀도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 기준은 아마도 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다소 '어두운' 삶을 나와 공유 해봤는지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지만. (범죄를 저지르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놀라지 마시길.)
길게는 25년 이상, 짧아도 15년 이상 오랫동안의 친교를 맺어온 고향 친구들이 있다. 중고교 시절 순수한 언어생활에 매진했던 관계로 이 오랜 친구들사이에서도 크게 심한 말을 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 중 내가 정말 사심없이 '야 이 XX놈아'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가 바로 H다.
H와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였다. 그는 소위 '유학생'이었다. 지방이지만 대도시라고도 할 수 있는 광주(光州)는 고등학교만 되어도 전남 지역에서 유학하는 '유학생'들이 한 반의 4~50%를 차지 했다. 그는 좀 더 일찍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광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노련한 유학생이었고, 2학년이 되어 그와 한 반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의 고향을 지칭하는 '해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순진한 듯 하면서도 적당히 놀 줄 아는 모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될성부름을 간파했던 나는 우리 '조직(학교는 제각각인 동네 친구들)'에 그를 영입했고, 아직까지도 조직원으로 잘 활동 중이다.
그 이후 대학 시절 서울로 같이 유학하였고, 내가 좀 더 일찍 직장을 다니게 되어 주머니에 돈 좀 쥐고 있던 시절에는 같이 '화류계'를 전전하기도 했다.
H도 졸업을 하여 취직을 하였고, 직장 생활 1년 만에 연고지 우선의 법칙에 의해 광주 발령을 받았다. 서울 생활을 꿈꿔왔던 그에게는 다소 우울한 소식이었다. 송별회랍시고 껀수 잡아 만나서 음주가무를 즐겼던 나이트 클럽에서 그는 '1년만 있다가 나 다시 돌아 올거야!'를 부르짖었고, 송별회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앞서 그저 '부킹'에만 열 올렸던 나는 그 곳이 하이얏트의 'JJ'였는지 힐튼의 '파라오'였는지 기억이 희미할 뿐이다.
1년 후 서울 수복을 외치고 낙향했던 H는 그러나, 근무하던 지점에서 지금의 색시를 만났고, 일찌감치(나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장가들어 딸딸이 아버지가 되었다. 비교적 페이가 좋은 금융권 기업을 다니는 H는 집값도 싸고 물가도 싼 광주에서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운동삼아 골프를 즐기며 가끔 필드에 나가기도 한다는 그는 지난 해 광주에 가서 모처럼 만났을 때 나를 동네 참치 횟집으로 이끌었는데, 정갈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횟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 등 이미 지역 유지로서의 입지를 굳힌 듯 하다.
아들 귀한 집안의 막내 외동아들로 자란 H는 칠순이 훨씬 넘은 홀어머님을 위해서라도 부의 상징이라는 '세째'에 도전할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이 놈과 전화 통화라도 한 번 해봐야 겠다.
"야 이 XX놈아, 너는 형이 먼저 전화 안하면 평생 연락도 않을 놈이다"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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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있었던 H와의 귀여운 일화 한 토막.
토요일 오후 자율 학습이 끝나가는 시간쯤 옆반이었던 H가 냉큼 와서 하는 말.
"야 야, 내가 어제 겁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디, 너 한 번 사주께 이따 끝나고 같이 가자"
학교 앞 분식점 가는 일도 흔치 않던 가난한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적에도 학교에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회수권만 달랑 두장 들고 집을 나서던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간혹 얻어 먹는 일을 제외하면 군것질 할 기회도 없었다.)
하교길에 학교앞 분식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H는 문제의 음식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았다.
"허벌나게 매우니까 먹을 때 각오 좀 해야 쓴다. 근데 또 매우면서도 맛있당께로"
열아홉살 초가을 그 날 나는 H덕에 생전 처음으로 '쫄면'을 먹어 보았다. 어느새 17년 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