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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스의 산 I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미스터리의 보고(寶庫)라고 일컬을 만한 나라 일본.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많은 미스터리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되고 있는 많은 미스터리 소설 중에 영미의 본고장 추리소설 보다도 오히려 일본작가의 작품들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유명 소설가들로 인해 넓어진 일본 문학의 독자층이 장르 불문하고 "일본 소설"이라는 상품의 인기를 어느 정도 담보해 주는 것 같다.(김전일과 코난, 그리고 비슷한 정서의 동양 문화권 등 여러 다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관련 사이트들을 둘러보다 보면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대해 심도있고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으며 새로이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카무라 카오루 여사는 많은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중에 독특한 위상을 가진 작가이다. (근래에는 미스터리 소설을 쓰지 않고 있지만) 일단, 그에게는 "여류"라는 간판이 붙어 있지 않다. 많은 분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점점 여성 직업인들에게 "여류"라는 폭력적인 접두사를 붙이는 일들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아직도 얼마나 많은 "여류 작가"나 "여류 시인"이라는 레테르가 횡행하는가. 그래서 여성 작가에게는 "돋보이는 여자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 묘사" 등등의 찬사가 뒤따르는게 흔한 일이다. 그러나 다카무라 카오루는 진정한 무성(無性)의 작가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웬만해서는 비중있는 여성 등장인물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남자들로만 구성되 있는 강력반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어리숙하고 과도한 남성성을 표출하지도 않는다. '다카무라 카오루 월드'라고도 불리우는 자신만의 굳건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마크스의 산>은 집요하리 만치 세세한 배경 설명과 물기를 쏙 뺀듯한 건조한 문체, 강력반 형사들과 그들의 수사과정에 대한 극도의 사실적인 묘사등이 시종일관 어둡고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그동안 내가 읽었던 경찰 소설들도 어느 정도 "판타지"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네이버에서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라는 카페를 운영하시는 권일영 님 - 히가시노 게이고 시리즈의 번역자이시기도 한 - 의 개고본 비교글에 의하면 이처럼 드라이한 작가는 한층 더 나아가 일본에서 새로 개정 발행된 문고판에서는 소설의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실낱같은 희망의 싹 조차도 삭제시켜 버렸다고 한다.
책을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추월한 요즘에는 꽂아놓고 바라만 보는 책들이 많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입소문이나 리뷰를 통해 좋다는 평가를 익히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손이 잘 안가는 책들이 있다. 아껴둔다는 생각보다는 차일 피일 미뤄둔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다. 특히 <마크스의 산>이 그러했다. 최근에 나오는 책들 처럼 큼직한 글씨도 아니고, 헐렁한 편집도 아닌 오롯이 꽉찬 두 권의 분량과 굳이 책 앞뒤 표지에 쓰여진 줄거리를 훑어보지 않더라도 제목에서 익히 풍겨오는 묵직한 분위기 등은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다. 읽는 중에도 결코 진도가 빨리 나가는 책은 아니다. 또 이래저래 술자리가 많았던 주간에 집어들었던 책이라 꼬박 열흘 정도에 걸쳐서 완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고다 형사와 함께 헉헉대며 어렵게 기어 올라간 험준한 "마크스의 산" 정상에는 여느 걸작 소설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없는 여운과 감동이 있었다. 어느 정도의 감동적 결말을 필수 요소라고 여기는 일본의 사회파 소설들 중에서도 <마크스의 산>의 그것은 독보적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미나미 알프스의 정상에서 탁 트인 전방을 바라보고 있던 "마크스"의 모습이, 그의 어두웠던 인생이 가슴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