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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2000년 사유의 티핑포인트를 읽어야 현대 중국이 보인다
미조구치 유조 외 지음, 조영렬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_미조구치
유조, 이케다
도모히사, 고지마 쓰요시
공저/조영렬
역 | 글항아리
이 책에서 중국이라 함은 현대의
주권국가(중화인민공화국)를 가리키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그 영역이 늘거나 줄고 민족이 뒤얽히며 여러
분화가 뒤섞이고 교역하면서 현대에 이른, 그 변화와 흐름 속에서 한자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스스로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해온 세계를
가리킨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도대체
중국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이 과제로 삼은 시점은 중국의
사상을 아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중국을 아는데 있다 해도
좋다.”
책은 진한제국의
천하통일, 당송의 변혁, 전환기로서의 명말청초, 격동하는 청말민국 초기로 구분된다. 이 네 가지가 책의 제목에서 시사되고
있는 ‘네 가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격동의 시기가 이어지고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총괄평가, 중국혁명 재검토, 유물사관 재점검, 포스트모던 사조의 영향등과 아울러, 연구 주체의 문제, 시각의 문제, 방법론의 문제를 밑바닥부터 다시 물어보려한 시기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이 책 외에 『중국사상문화사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중국사상문화사전』의 자매편이기도 하다.
진한제국의 유교
국교화와 도교, 불교
중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학문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을 외친
것은 춘추시대 말(기원전 6세기)의 공자이다. 그를 개조(開祖)로 삼는 유가가 학문의 시초로
기록된다. 그 뒤 묵자를 개조로 삼는 묵가가
탄생했고, 유가와는 다른 사상활동을 펼쳐, 양자 사이에는 공자와 묵자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의 잘못을 타파하려는 많은 논쟁이 발생한다. 유교를 국교로 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다고 볼 수
없다. 당연한 귀결이다. 더군다나 이 무렵 여러 학문을 통합하려는 도가의 활발한
움직임까지 가세한다. 언제 유교가 국교로 책정되었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교국교화의 실현은 전한시대 말기 이후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단기간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유교에 대한 중시가 누적된 결말로 이뤄진 것이라
짐작된다.
유교국교화와
동중서
3단계의 과정을 거쳐 행해졌다. 맹아단계, 발전단계, 완성단계이다. 맹아단계는 문제로부터 무제시기(기원전180~기원전87)까지 이어진다. 유교경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학과 박사제도가
확립되고, 박사제자 제도도 창설되어 무제가 즉위한 첫해에는 유가
관료의 등용과 활약을 볼 수 있다. 발전단계는 소제에서 원제시기(기원전87~기원전33)이다. 황제자신도 유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유가관료가 정계에
진출한다. 완성단계는 성제에서 왕망시기(기원전33~기원후23)이다. 유향, 유흠이 육경을 중심으로 서적을 정리함과
동시에, 유교는 참위설을 받아들여 변모를
꾀한다.
당송의 변혁
중 왕권의 변질
한 대 이래 유교의 정치이론은 황제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준비해왔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하늘의 지고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의례 면에서는 교사로 대표되는 국가제사의 체계로서
시각화되어 군주의 권위를 장식했다. 당이든 송이든, 또한 명이나 청에서도 이 기본형에 변화는
없다. 그 점에서 한 대에 제정된 황제지배체제는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화제가
수립된 사건이, 중국의 정치체제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점에서
진시황제가 ‘황제(皇帝)’를 창설한 사건과 병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체상(政體上)의 변화는 2천 년간 분명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당과 송 사이에 ‘왕’의 존재방식을 둘러싼 정치이론에는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1) 왕조교체 양식 : 한에서 송까지는 선양, 이후는 군사적 제압.
2) 국호 : 송(그리고 요, 금)까지는 창업자와 연관된 지명.
3) 왕권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가 『효경』
『주례』에서 『주역』
『대학』으로 옮겨감.
「전통 속의 중국 혁명」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
공의혁명(公革命)으로서의 중국혁명
서구에서는 평등사상을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에선 정치적, 사회적인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으로서도
수용된다. 따라서 개인권(사유권)에 대해서는 그 ‘전사(專私)’성을 배제하는 측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서양의 그것과
비교된다. 청나라 말의 혁명가 진천화는 “우리는 ‘총체(總體)’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共和)라 함은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꾀하는 것으로 소수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쑨원의 삼민주의
쑨원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양쪽에서 중국혁명의 아버지로
존숭하고, 양 당은 민족, 민권, 민생을 말하는 그의 삼민주의를 각각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쑨원에게 자유는 민족 전체의 자유, 권리는 전제자를 물리친 국민 모두의
권리, 평등은 서로의 경제적 평등을 각각 지향한
것이고,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라든지 인권이라든지 사유재산권 같은 생각은 거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리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중국
관련 사상, 역사서와 다른
점
이제까지 중국의 역사를 밖에서 온, 즉 유럽 혹은 유럽화된 틀이나 개념으로 바라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시각과 달리 이 책은 중국의 내부에 시점을 두고
있다. 중국에 내재해있는 역사의 논리로 중국사상사를 구성하려는
저자들의 의지가 많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