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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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한 강 / 문학과지성사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_어느 늦은 저녁 나는전문

 

시인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밥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그렇게 시간은 흩어진다. 사라진다.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생각이 담긴 글들일까? 그것은 영원할까? 지나가버린 것, 이미 지나간 것. 그것들은 어쩌면 나와 함께 영원히 지낼 것 같은 존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 역시 그렇게 착각할 때가 많았다.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그것에 마음을 담아둔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흩어져버릴 것이라고 그냥 지나쳐야할까?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은 지금 이 시간이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현실이다. 살아있는 존재감이다.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_ 괜찮아전문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부끄럽다. 까닭 없이(없긴 왜 없겠냐만) 울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에게 왜 그래, 도대체 왜 그래?”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위로를 받아본 사람이 위로를 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의 어깨를 도닥여 본 사람이 받을 줄도 안다. 괜찮아, 괜찮아..입술 열어 나에게 말을 건네 본다. 희한하다. 진짜 마음이 평안해진다. 우리는 너무 묻고 따지며 살아가고 있다. “뭐가 괜찮다고?” 하면서 역정을 내지말자. 그냥 괜찮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생각하자. 그렇게 살아가자. “괜찮아, 괜찮아, 당신 잘 하고 있어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_그때전문


살아가며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더 이상 일어날 기운이 없다고 주저앉아만 있던 때도 있었다. 이젠 이 세상도 끝이라고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상황, 더 힘든 상황은 여전히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허상에 붙잡혀 살아갈 때는, 아마도 내 안의 생각들이 더 힘들고 지독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진짜는 아직 안 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순번을 한참 뒤로 넘겼다고 생각하자. 안 오면 더 좋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다음엔 또 어디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 살아있어야만 한다. 몸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다. 의식(意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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