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나희덕 지음, 신철 그림 / 나라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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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_나희덕 저/신철 그림 | 나라말

 

1.

는 어딘가에서 띄워보낸 유리병 편지와 같다.’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를 시()로 담아냈던 20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파울 첼란이 한 말입니다. 언젠가 누구의 손에 들리어져 그 안에 담겨진 깊은 사연들에 생명력이 불어 넣어지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2.

나의 메일함엔 매주 한 편씩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가 운영하는 '사이버문학광장'에서 보내주는 '문학집배원'이라는 메일이 담겨있습니다.

 

3.

늘상 쉬지 않고 큰 파도가 출렁이는 동해 바닷가 모래밭에 가 앉아 있을 때가 있지요.(...)

내 안에도 '다락같은' 말들이 숨어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을 첨벙거리며 내달리고 싶은 심정, 속도가 쫒아오지 못할 '속도'로 달아나고 싶은, 마침내는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는 지경의 그것에 이르고 싶은 심정이 그곳에 가 앉게 하지요."

 

4.

이 책은 저자가 문학집배원의 역할로 이 사회라는 바다에서 어쩌면 표류하고 있을지도 모를 구성원들에게 마치 유리병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보낸 시들이 담겨 있습니다. , 여름, 가을, 겨울로 편집했군요.

 

5.

"산비알 흙이 / 노랗게 말라있다 /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 저 밭의 마른 겉흙이 /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 땅속에서 조금씩 / 잊는 동안 //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 고영민)

.... 봄이 되면 겨우내 동면에 잠겨있던 논밭을 뒤집지요.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객토도 하지요. 시인은 겨울을 지낸 흙에게 말을 겁니다.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이란 표현이 참 좋습니다. 저자는 이 시인의 시에서 '저녁 무렵 밭에서 돌아오는 누렁소의 워낭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고 표현하는군요.

 

6.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 미쳐 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 당신이 직접 /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 강가에서는 우리 / 눈도 마주 치지 말자." (/ 황인숙)

..... 계속해서 내 감상을 적습니다. 누구나 가슴에 돌덩이 하나씩 안고 살아갑니다. 가슴뿐이겠습니까. 머리에도 어깨에도 등에도..아니 발목에도 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요. 강은, 강물은 한 장소에서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한 번 지나가고 나면 그만입니다. 뒤돌아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속상하면 강으로 가고 싶지요. 그러나 뛰어들진 맙시다. 그리고 시인의 말처럼 우리 혹시 마주쳐도 아는 척 맙시다.

 

 

7.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 햇볕이 숨어 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 혼자 우는 것 /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의 소원 / 안도현)

..... ~것으로 시작해서 ~것으로 끝납니다. 마지막 연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에 꽂힙니다. 그래 초록은 한 색이나 가을 단풍은 여러 모양이더라.

 

 

8.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 하얀 발가락으로 /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연애의 법칙 / 진은영)

..... 연애가 어찌 달콤하기만 하겠습니까. 쓴맛 짠맛 다 담겨 있지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나를 포옹하는 것은 너무 밋밋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방심하고 있다가 홀로 돌아오는 샌드백에 뒤통수 맞는 모습이 그려지는 건 어쩐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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