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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수업 -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김소향 옮김 / 인빅투스 / 2014년 5월
평점 :
『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 인빅투스
‘상실’을 생각해본다. 그 대상은 사람일수도 있고, 어떤 추상적인 존재일수도 있다. 이 책에선 사람이 상실의 대상이다.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 내어 분노하라. 판단하지 말고, 의미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오직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 어차피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도 불공평하다. 그러니 이토록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불공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높고 낮은 산들이 계속 첩첩이 이어지는 풍광을 그려보게 된다. 높고 낮음 그 어디에나 태양이 비추고, 바람이 들어찬다. 그렇다면 거침없이 너른 평야는 어떤가. 더 황망하다. 그러니 높고 낮음에 너무 마음 두지 말자는 이야기다. 산들이 애당초 그렇게 자리 잡고 있진 않았다. 그 산들이 바다 밑에 잠겨 있었던 모습을 생각해봐라. 낮은 곳이 깊은 곳이었다. 단지 분노를 하되, 지혜롭게 할지어다. 이 글에서처럼 소리 내어 분노하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는 말에 초점을 맞출 일이다.
“눈물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라. 하지만 이것을 알라.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버리는 것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억제된 슬픔 역시 병이 된다. 살아오며 자주는 아니지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희한한 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 구석구석에서 눈물, 콧물로 몰려나오는 것이다. 별별 기억이 꼬물거리며 살아나고 원초적이고 철학적인 존재론적 사고도 뒤섞인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후 찾아온 평안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평화다.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착하고 바르게 살면 그 대가로 고통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랑할 권리를 조용히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사랑은 내 것을 비우는 것이다. 채우려고 사랑하지 말라. 혼자 살 수도 있는 사람이 결혼해도 잘 살 수 있다. 고독과 외로움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꿈꾸지 말자. 내가 이 땅의 한 사람 구제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마음 하나면 결혼할 준비는 다 마친 거다. 잘 산다는 것을 경제적인 문제로만 생각하지 말자. 재력이 든든하면서도 평안하게 사는 가정 별로 못 봤다. 깨지지 않고 끝까지 잘 가는 것이 행복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땅을 떠나면 더블 행복이다.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 이제 됐다. 그만 하면 됐다. 이제 당신에겐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가서 자신과 접촉하고,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몸의 속도를 늦추고, 오직 몸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라.”
몸이 보내는 신호엔 무심하고, 마음이 보내는 기척엔 매우 민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 볼 일이다. 아기 엄마는 아무리 피곤해도 잠결에 아기가 칭얼대면 여지없이 깬다. 도저히 못 일어날 정도면 눈을 감은채로 아가의 가슴이라도 토닥여준다. 뭐라 뭐라 하면서. 이 책에선 상실 후 슬픔을 회복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몸을 위한 마음도, 마음을 위한 몸도 깨어 있어야 건강하다. 몸의 속도를 늦추고, 마음의 속도도 늦추고 나를 다시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그렇게 해야 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매우 오래 전부터 익숙한 이름이다. 『죽음의 순간』을 통해 만났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