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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쎄인트의 冊이야기 2016-088
【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 현기영 / 다산책방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인생사를 통하여 노년처럼 뜻밖의 일은 없다. 아등바등 바삐 사느라고 늙는 줄 몰랐다.” 예전에는 쌀을 항아리에 담아놓고 양푼이나 바가지로 퍼 먹었지만, 쌀통이 나온 뒤로 한 번 들이 부어놓곤 밑에서 빼먹기만 한다. 쌀이 얼마나 남았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빈 통을 만나게 된다. 나이를 먹어가는 일이 꼭 그런 듯하다. 늙지도 않을 것 같다. 마르고 닳도록 살 것도 같다. 그렇게 잊고 살아간다. 나이 듦과 죽음이라는 관념에서 억지로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다. 작가의 표현처럼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부지불식간에 죽음과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으나 죽어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한다. 공감이 간다.
사회 명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마음이 심란할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 이름의 노예로서 일생을 살아 온 면이 클 것이다. 세상이 그 이름을 잊는 걸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이름이 지워질 때의 정신적 고통, 그 쓰디쓴 절망감은 다름 아닌 죽음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높은 사람일수록 두 번의 죽음을 겪게 된다고 한다. 높은 지위에 자리하다 정년퇴직하고 나서도 아직도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후임으로 앉아 있는 사람 또는 예전 부하직원들에게 지시를 하는 황당무계한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사람에겐 그 자리가 목숨과도 같은 자리가 아니었을까? 꿈과 현실을 분간 못하듯, 퇴직 전과 퇴직 후 자신의 위치감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심각하다. 이야기가 어찌 이렇게 흘러갔지만,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 ‘이름의 노예’, ‘자리의 노예’라는 단어를 통해 그 사람이 생각났다.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하다.
소설가 현기영의 산문집이다.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이 듦’과 ‘자연’이다. 작가는 ‘내 안의 죽음’을 달래기 위해 도시 밖으로 자주 나간다고 한다. 자연은 노년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란다. 조만간 돌아가야 할 곳이 그곳이기에 더욱 정이 간다고 한다. 인간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삼았던 옛사람들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후 나의 유전자는 두 방향으로 전달 될 것이다. 한쪽은 종족의 한 분자로서 후손에게 전달되고, 다른 쪽은 자연의 한 분자로서 초목과 곤충에 전달된다.”
1941년 제주도 태생인 작가는 제주의 이런 저런 모습을 그려주기도 하지만, 33년 전 작가의 작품 「순이 삼촌」이야기를 꺼낸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며, “내가 처음으로 제주 4. 3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순이 삼촌」을 쓸 때의 내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라는 말을 한다. 작가가 「순이 삼촌」을 쓸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은 4. 3의 글쓰기도 조금은 너그러워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단다. “글 쓰는 자는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각성이 생겼다.” 작가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자리 잡기까지 3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싸우는 동안 증오의 정서가 필요했고, 증오가 가득한 가슴으로는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속이 느끼했는데, 이제 나는 그 사랑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도, 그것을 노래한 사랑의 시에 대해서도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한다.”
어렸을 때, 좀 놀아 본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어려서 억압받고, 구속당하고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삐딱선을 탈 가능성이 많아질 것이다. “어른은 자신의 아이 시절에서 배운다.” 아이 시절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많이 부족했던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 시절의 아이가 늙은 나를 꾸중하면서 잊어버린 것들, 잃어버린 것들을 일깨워준다. 도시에 살면서 하늘의 구름, 달, 별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나를 꾸중한다. 들판에 퍼질러 누워 느긋하게 오래 바라봐야만 그것들이 제대로 보이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작가 현기영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순이 삼촌』, 장편 『바다에 우짖는 새』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