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3 - 연산군에서 선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3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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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3) KBS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KBS역사저널 그날 제작팀에서 책으로 엮은 그날 3이 나왔다. 나처럼 TV를 자주 안보는 입장에선 퍽 고마운 책이다.

 

우리에겐 수많은 기록과 기억이 있다. 그것들을 꿰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와 너, 우리가 탄생한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며, 때로 무기가 되고 거울이 된다. 역사의 무궁한 힘을 믿기에 그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 읽고 쓰고 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산군, 중종, 임꺽정, 송강 정철, 사도세자, 율곡 이이 등등이다. 뒤를 이어 이몽룡, 승정원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번의 사화로 정국에 피바람을 몰고 온 연산군의 독재정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내관 김치선은 연산군의 엽기적인 폭정에 죽음으로 저항했다. 15069월 중종이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날은 조강지처 단경왕후가 폐위되는 비극의 날이기도 했다. 명종 때인 1559년에서 1562년 전국을 휩쓴 도적 임꺽정의 반란은 흩어지면 백성이 되고 모이면 도적이 되는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동서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된 선조 시대,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천여명의 선비가 희생되었다.

 

 

사이코패스 연산군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움켜쥔 권력을 국정개혁이나 경제발전 같은 건설적 목표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사치, 사냥, 음행 같은 말단적 행위였다. 그는 갑자사화를 전후로 편집증에 가까운 행동을 자주 드러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언론 통제이다. 언론 통제는 구린데가 많다는 것이다. 국왕과 관련된 발언에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관원이 친족과 국왕에 관련된 의견을 나누다가 적발되면 당사자는 촌참(寸斬, 신체를 마디 내어 죽이는 형벌), 부자와 형제는 참형에 처했다. 모든 공문서에는 발언자의 이름을 명기시켰다. 그러나 연산군은 겨우 하나는 알고 둘까지는 몰랐다. 그 당시 관리들과 백성들의 입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후세대에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 까지 다 전해지리라 예상이나 했을까?

 

 

 

조선, 임꺽정과의 전쟁을 선포하다

 

1559(명종 14) 조선에선 도적 떼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마을을 약탈하고 관아를 습격했으며, 심지어 토벌에 나선 포도관까지 무참하게 살해했다. 도적 떼는 황해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공권력에 저항한 도적 떼의 두목은 바로 임꺽정이었다. ‘도적의 이미지는 당연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긍정적 의미가 겹치는 것은 그 시대가 그만큼 부정적이라는 방증이다. 이른바 의적은 부패가 만연한 혼란기에 나타난다. 한국사에서 임꺽정은 그런 의적의 대표적 인물이다. 억세고 거친 어감을 지닌 그의 이름은 조선 중기 사회사에서 누락할 수 없다. 성호 이익은 그와 홍길동, 장길산을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다.

 

 

 

정철, 기축옥사 특검 되던 날

 

1589(선조 22)10, 선조 앞으로 한 통의 비밀 장계가 올라온다. 바로 역모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크게 노한 선조는 역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이 죽은 뒤에도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인다. 3년이나 이어진 수사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만 1000여명. 조산 최대의 옥사. 기축옥사다. 그런데 이 참극 가운데엔 송강 정철이 있었다. 역모 가담자를 색출하는 총책임자로서 국문을 담당한 것이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가사 문학의 대가로, 정치인보다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송강 정철. 그는 왜 피비린내 나는 정치 참극의 중심에 있었던 걸까? “사람과 글은 다르다는 말이 있다. 글로 표현한 것처럼 살다 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글과 사람을 같은 라인에서 평가하긴 힘들다는 이야기다. 정철은 시대의 희생자인가? 아니면 이중적이거나 다면적인 존재였던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다. 기축역사의 광풍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선조는 돌연 태도를 바꾼다. 호랑이와 독수리의 절개를 가졌다며 정철을 총해했던 선조. 하지만 정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며 혹독하고 간사한 정철이란 표현까지 쓰며 그를 강하게 비난한다. 기축옥사가 진정된 1591, 좌의정까지 올랐던 정철은 파직돼 결국 평안도 강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 하나로, 죄인이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귀양 간 곳의 집 둘레에 탱자나무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된다.

 

 

story가 담긴 History 그날다음 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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