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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치요 - 3천년 리더십의 집대성
샤오샹젠 지음, 김성동.조경희 옮김 / 싱긋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冊 이야기 2015-033
『군서치요(群書治要)』 샤오샹젠 풀어 엮음 / 싱긋(문학동네)
책이 귀하던 시절 어렵게 출간된 책이 전란(戰亂)을 겪으며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국으로 나갔던 책 한질이 그 나라의 문자로 번역 출간되면서 그곳에서 오랜 동안 그 명맥이 유지된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 책은 원래 출간 되었던 나라로 다시 돌아와 크게 숨을 쉰다. 바로 이 책 『군서치요(群書治要)』 에 얽힌 이야기다.
“짐은 어려서 무력을 숭상하고 학업에 정진하지 않아, 선왕의 도는 아득하기가 바다를 건너는 듯했다. 편찬된 이 책을 읽으면서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니, 짐이 국가의 안정과 평안을 위한 정치를 펴는데 옛일을 고찰하여 유익한 적용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정무를 처리하면서 의혹이 없어졌으니, 그 수고로움이 참으로 크지 아니한가!”
당태종과 『군서치요(群書治要)』
위에서 지칭되는 ‘짐’은 당왕조의 정관(貞觀) 초년의 태종 이세민(李世民, 599~649)이다. 나이 열 여덟에 부친을 따라 종군한 당태종은 봉기를 일으켜 사회를 평정하며 전장에서 심 년 넘게 분주한 세월을 보냈다. 스물여덟 살에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는 전쟁을 멈추고 문교에 힘썼으며, 특히 치평지도(治平之道)에 힘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당태종 이세민은 즉위하고 나서 두 달 뒤에 홍문전에 홍문관(弘文館)을 설립하도록 했다. 홍문관은 국가의 장서기관이자 황제가 문학지사(文學之士)들을 불러 모은 곳으로, 저량 · 요사렴 · 채윤공 · 소덕언 등의 영재들을 집결시켰으며, ‘정사를 논할 때 전내(殿內)로 불러들여 문장의 의미를 강론하게 하고’, ‘밤이 되어서야 헤어지곤 했다’. 매번 조정에서 공무를 논한 뒤, 태종은 현인들을 홍문관으로 초빙해 치국의 묘책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으며, 이를 이후 시정의 훌륭한 방책으로 삼았다.
많은 현인들이 홍문관에서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입직했지만 시간적, 물리적 한계가 있었다. 고대의 경전이 워낙 방대했다. 설령 많은 책을 두루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 핵심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에 태종은 『군서치요(群書治要)』를 편찬할 생각을 하게 된다.
“태종은 과거 왕조의 득과 실에 대해 알고자 위징 · 우세남 · 저량 · 소덕언을 불러 경사서 가운데 역대 제왕의 흥기와 멸망을 다룬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편찬하여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명을 내렸다. 태종은 이 책의 내용이 깊고 넓으면서도 간단명료한 점에 매료되어 말했다. ‘짐이 옛일을 고찰하여 지금의 정사를 처리하면서 의혹이 없는 것은 모두 그대들의 공헌이오!’ 그러고는 후한 상을 하사하였다.”
『군서치요(群書治要)』 의 긴 여정
이처럼 진귀한 책이 당시 중국에서 조판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데다 당왕조 말기의 전란을 거치며 송왕조 초에 이르러서는 그만 실전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일본 사절단이 이 책을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줄곧 일본의 역대 천황과 황자, 대신들 사이에서 법도로 받들어졌고, 이로써 중화문명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 일본의 간세이 8년(1796)에 오와리 번주 가문은 이 책이 이미 중국에서는 실전(失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섯 부를 중국에 전한다. 『군서치요(群書治要)』는 모두 50권(3권 망실, 47권 보존)으로, 경전 65종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기본적으로는 경서(經書), 사서(史書), 자서(子書)의 차례로 배열되어있다. 그러나 이백년 가까이 중화정통의 성철(聖哲)교육이 쇠락하면서, 이 책은 그저 학자들의 서재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1990년대에 이르러, 주일 중국대사였던 푸하오가 일본 황실의 구성원을 통해 『군서치요』 한 질을 구해 2004년에 재출간한다. 최근 들어서는 2012년에 중국서점이 온전하게 주를 달고 번역한 『군서치요』를 출판하면서 원래 망실되었던 세 권을 보충하여 수록했다. 이에 이르러 『군서치요』는 다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현재 이 책은 중국의 지도급 간부와 전문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목을 받고 있다.
하늘 무서운지 알지어다
『군서치요(群書治要)』에 오른 많은 사상 중 으뜸은 천도(天道)사상이다. 「천도를 본받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룬다」이다. ‘하늘을 본받아 행하는 이가 천자이다’, ‘하늘의 도를 실천하고 하늘의 덕을 실행한다’, ‘하늘을 따르면 길하고 하늘을 어기면 불길하다.’ 등이다.
고대 중국에는 네 가지 교육이 있었다. (현재도 이렇게 되어 진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과거완료로 표현) 첫째가 가정교육이고, 둘째가 학교교육, 셋째는 사회교육, 넷째가 종교교육이다. 이 네 가지 교육은 가정교육을 근본으로 삼으며, 종교교육을 궁극적인 완성으로 삼는다. 뒤늦게 생긴 종교교육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한(漢)왕조부터 시작된 불교와 위진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도가는 중국본토의 종교이며, 이에 유가가 더해져서 유(儒) · 불(佛) · 도(道)라고 일컬어진다. 이 삼교의 교육은 모두 악을 끊고 선을 닦을 것과 미혹함을 부수고 깨우침을 얻을 것, 범인의 영역을 벗어나 성인의 경지로 들어설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5 · 4’운동 이후 유가는 타도되었고, 불교와 유가도 대부분 교육을 그 근본으로 하지 않았으며 그런 까닭에 미신으로 여겨졌다. 이로부터 현대인의 신앙적 결함과 도덕적 쇠락이 초래되었으며, 많은 사회적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군서치요』에서는 비록 종교교육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역사책의 기록을 보면 당태종 본인이 각 종교를 힘써 보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왕조 시기에는 유 · 불 · 도 삼교가 매우 흥성하였다.”
(p.152)
* 오사운동(五四運動) : 1919년, 러시아 혁명(1917년)의 영향을 받아 중화민국 베이징 대학의 대학 교수, 강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한 반제국주의 ·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이다. 중국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되는 사건이 되었다. 학생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변화된 정치운동이다. 중국 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또한 중국 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중국의 고전 연구자 샤오샹젠이 풀어 엮은 『군서치요심득(群書治要心傳)』을 번역한 것으로, 작금의 중국 상황과 맞물려 그 특별한 존재의 의의가 더욱 빛난다. 아쉬운 점은 『군서치요』 원전이 중국 대륙에서 오랜 기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점이다. 책이 그대로 있었다할지라도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그대로 읽히며 마음에 담고 몸소 실천하며 후세대들에게 전해졌으면 지금의 중국은 분명 달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혁명」 같은 세상에 전무후무한 운동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