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 2014-209

 

공허한 십자가히가시노 게이고 / 자음과모음

 

1. “이구치 사오리. 그녀에게는 엄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안타깝게 시작된다. 모든 이들에게 대체적으로 엄마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의 고향이다. 사오리의 엄마는 그녀가 철이 들 무렵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추억이 있을 리가 없다.

 

2. 사오리의 고교 2학년. 학교 밖에서 우연히 한 해 선배 남학생 후미야를 만난다. 운명적인 만남이다. 하긴 살아가며 운명적이지 않은 만남이 있겠냐만. 그 만남이 이 소설의 기초를 만들어주고 있다.

 

3.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건의 연속과 갈등이다. 8세 소녀가 강도에게 살해를 당하는 것으로 긴장감이 형성된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일보다 더한 일이 어디 있으랴. 가해자가 한 명, 피해자 역시 한 명일지라도 실질적인 피해자는 수십 명이 될 수도 있다. 그 가족과 주위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 무거운 그림자와 불안감이 드리워지기 때문이다.

 

4. 피해자는 여러 번 운다. 사고를 당해서 황망한 마음에 혼이 빠져나가며 울고, 수사 과정 중에 피해자가 가해자로 오인 받는 경우도 있다. 내 자식,형제, 부모가 비록 참혹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어도 내 마음껏 끌어안아 볼 수도 없다. 법정 공방은 어떤가. 살인자의 변호사는 비록 그의 역할이 그렇다 치더라도 고의적이 아닌 우발적이라는 점, 정상 참작을 해달라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5.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현재 인간 사회의 사법제도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한다. 갱생제도의 문제점, 사형제도 등. 그러나 이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지도 않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생각으로 유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이다.

 

6. 달리면서 생각하는 숙제이다. 사건 주변의 상황이 시선을 붙잡아 두기 때문에 그렇다.

 

7. “부디 피고인을 사형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아니, 그렇게 해도 피고는 죗값을 치룰 수 없습니다. 그만큼 피고는 무거운, 아주 무거운 죄를 저지른 겁니다.”

 

8.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의 사형이 확정되고 판결이 종료되면, 자신들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응어리를 날려 보내고, 가슴에 매단 무겁디무거운 연자 맷돌을 내려놓게 되길 바란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란 희망감도 생긴다. 그러나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실감만 더해질 뿐이다. 그때까진 범인이 사형 판결을 받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오지만, 막상 사형이 집행되고 나면 이젠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다. 가해자가 사형을 당한다고 해서 내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9. 그렇다고 그 반대로 가보면 어떤가? 가해자가 유기 징역이나 종신형을 받고 살아간다면, 그 상실감은 또 어떻게 채울 것인가. “왜 범인은 살아 있는가? 왜 범인에게 살아 있을 권리를 주는가?” 범인은 살아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어쩌면 취미 생활도 할지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말을 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10. 책의 제목으로 쓰인 공허한 십자가는 작가의 극 중 인물이 쓴 글 에서 따왔다. 흔히 죄를 지은 사람은 평생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산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더 무거운 십자가와 연자 맷돌까지 발목에 달고 살아가는 것은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의 유족이 아닐까? 그래서 공허한 십자가이다.

 

11. 히가시노 게이고. 대단한 작가다. 글의 구성력이 탄탄하다. 허투루 쓴 문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적 이슈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넣어주고 있다. 마치 편식하는 아이의 반찬속에 골라내기 쉬운 식재료를 넣은 듯 만 듯 그렇게 상차림을 해주고 있다. 마지막 한 점이 남을 때까지 수저를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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