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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冊 이야기 2014-200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 자음과모음
1. “너는 선택을 해야 해.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사는 존재가 되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리는 존재가 되느냐.....” 나와 격이 맞지 않는 사회가 싫다고 은둔형으로 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한 번 이 상황에 빠지면 다시 사회라는 흐름에 합류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사회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를 떠난 것이라고 자위를 해보지만 별 차이가 없다. 마음에 자리 잡았던 힘든 그늘이 어두움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2. 크나큰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겨진 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일 것이다. 그것도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 살인사건으로 죽음으로 변한 모습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3. 소설의 화자(話者)이자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힘겹게 씨름하는 ‘나’는 은둔형이 되느니 적당히 사회 속으로 기어들어가 살고 있다(본인은 이런 표현을 싫어하겠지만 내 느낌에는 그렇다).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한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준비만 몇 년이다.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답한다. ‘준비 중’.
4. 여자가 생겼다. 술집에서 우연히(아닌) 만난 중학 동창이다. 가끔, 요즘은 거의 매일 그녀의 원룸에 가서 그녀와 몸을 섞는다. 마음이 섞인 것은 그 뒤로 한참이다. 소설 속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 마치 친남매지간처럼 닮았다. 자라온 환경, 각기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켜준다는 마음까지 들 정도로)수호악(惡)까지도.
5. 1988년에 세간을 뒤흔들었던 히오키 사건. 도쿄 네리마 구의 민가에서 히오키 다케시라는 남성과 그의 아내 유리. 그리고 그의 장남이 사체로 발견되었다. 12세의 장녀만 살아남았다. 당시 이 가옥은 밀실 상태였다. 현관, 창, 모든 곳이 잠겨 있었다. 다만 한 군데, 화장실 창은 열려 있었으나 작은 환기용 창이어서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었다.
6. 내가 지금 만나는 여자가 그 유일한 생존자. 그 불운한 가족의 장녀였다.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녀와 같은 나이인 12살이었다. 부쩍 그 사건이 궁금해진 ‘나’는 그 ‘미궁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혼란스럽다.
7. 뒤늦게, 서류상으로도 나의 여자가 된 그녀가 그날의 상황을 소상하게 전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나나 그녀나 내면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 말고는 인정되는 것이 없다. 나의 내면 어둠의 장소에는 오래전부터 R이라는 존재가 살고 있었다. 그 R 곧,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둠의 기운은 누군가에게 오더를 내려서 내 대신 사건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끔찍한)살인사건이나 테러, 방화 등. 물론 안 좋은 생각이란 것은 잘 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생각. ‘저 인간만 세상에 없으면’, ‘누가 내대신 없애줘졌으면..’하는 마음은 사그라질 줄 모른다.
8. “R은 너에게서 떨어져 어딘가 먼 곳의 진흙탕 속으로 갈 거야. 너의 음울한 모두를 등에 짊어진 채로, 그리고 그 넓고 더러운 진흙탕 속에 묻혀버려.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어디 이래도 버티나보자, 라고 할 만큼 떡이 되게 두들겨 패고, 참혹하게 쓰레기처럼 묻어버려. 그리고 너는(그냥 살아).” ‘나’ 어렸을 적 나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가 해 준말이다.
9. 스릴러 소설이라고 하지만, 심리소설에 가깝다. 일어난 사건과 그 주변 상황은 마음 한편이 시리고 선뜻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스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