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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소소한 풍경』 박범신 / 자음과모음
풍경을 그리는 이, 바라보는 이
풍경화를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멋있다. 잘 그렸다. 어딘지 한 번 가보고 싶다. 이런 통상적인 느낌 이외에 나는 풍경화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려나가는 화가의 뒷모습을 봅니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한껏 치켜 올라가는 어깨를 봅니다. 그림을 그리다말고 그저 먼 산과 들과 바다를 바라보곤 하는 그 사람을 봅니다.
지금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온 후 그림으로 재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오래 된 그림일수록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의 존재감은 실시간이었습니다. 꼼짝마라 하고 앉거나 서서 그렸지요. 그날 다 못 그리면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다시 갔겠지요. 날씨나 개인사정 등으로 원샷에 못 끝낸 그림은 며칠을 두고 완성해나갔겠지요.
어쨌든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마음 엿보기를 좋아합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화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림의 일부분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림 속 어딘가에 화가 자신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지 않았을까?
‘풍경’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이 책의 제목과 분위기가 풍경으로 시작해서 풍경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중심엔 살아 움직이는(또는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소소한 풍경」
‘소소하다’는 말 아시지요? 사전적 의미는 ‘대수롭지 않고 자질구레하다, 어김이 없고 밝고 분명하다’입니다. 소소한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결코 소소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소소에 대한 시시비비를 염두에 두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소읍의 이름을 ‘소소’라고 한 듯 하네요.
한 지붕 밑 기묘한 동거
책을 펼치고 얼마 안가서 ‘시멘트 데스마스크’를 만납니다. 석고가 아닌 시멘트라?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석고 데스마스크는 작품성이나 있지만, 시멘트는 그것이 아니지요. 살인의 추억 또는 기억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리고 조금 더 가다보면 한 침대 또는 한 방에서 한 밤을 지새우는 한 남자와 두 여자를 만나게 될 겁니다. 여기서 섣불리 이 소설에 대한 평가와 선입견을 버리셔요. ‘뭐야? 이런 분위기였어? 작가님도 이젠 소재가 거덜 난 모양이야’ ‘이젠 이런 분위기로 가시겠다고요?’ 잠시 이런 생각이 들더라도 그들을 멀리 보이는 풍경쯤으로 생각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ㄱ, ㄴ, ㄷ
그 풍경(인물)의 이름은 ㄱ, ㄴ, ㄷ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름을 완성해줬지요. ㄱ은 ‘그리움’, ㄴ은 ‘노래’, ㄷ은 ‘돌아감’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억지입니다. ㄱ은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ㄴ은 기타리스트이지 보컬은 아니고, ㄷ은 언젠간 돌아가고 싶지만 막상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붙여준 이름들이 그리 낯설진 않습니다. 그런대로 맞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첫 그림이자 기본 화자인 ㄱ은 생각이 많습니다. 그리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미처 여물기 전에 가족들을 앞서 보냅니다. 그런데 작가는 어찌 작품에서 ‘죽음’마저도 애틋한 의식(儀式)으로 바꿔놓는지 참으로 감탄입니다.
어제 집안 어르신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벽제 화장장에서 동작동까지 갔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국가유공자라서 현충원에서 거행하는 안장(安葬)의식을 치르게 되었지요. 그 잔상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을 소설에서 받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황망하게 다가오지만 마치 그들은 어떤 의식을 치르듯 그렇게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책을 읽던 중이었지요. 물론 책은 집 제 책상에 있었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고인에 대한 생각 틈틈이 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어찌 목숨 걸듯이 물구나무를 서고, 죽기 살기로 우물을 파는 일에 몰두 했을까? 그리고 어찌해서 그 우물로 사라졌을까? 그 물길을 따라 그는 어디로 가고 싶었을까?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까? (기타로)무엇을 더 연주하고 싶었을까?
ㄴ이 물구나무 서는 일에 몰두했던 것은 답이 나오더군요. 내 몸 안에 있는 힘을 모두 빼기. 마치 풍선에서 바람을 쥐어짜낸 후 다시 새바람을 채우듯, 아니면 그저 빈 채로 접어놓듯이 그렇게 힘을 빼고 있었더군요. 그리고 우물물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아니면 그 흐름을 따라(땅 속에서도 흐름이 있으니까)가다보면 강줄기를 거쳐 어느 바다 한 가운데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풍경 ㄱ, ㄴ, ㄷ
ㄱ, ㄴ, ㄷ (그리움, 노래, 돌아감)이 보여주는 빛깔은 아마도 우리 마음 어딘가에서 한 덩어리로 뭉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론 이 중 하나 또는 둘이 잠시 자리를 비워주는 일도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ㄱ, ㄴ, ㄷ의 몸, 마음의 나눔이 애틋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지도 모릅니다. 이건 비밀인데요. 그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