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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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1958년부터 1964년 사이에 씌어졌다.”로 시작하는 작가 서문은 제법 길다. 이렇게 긴 줄 알았으면 그냥 본론부터 읽을 걸 그랬다.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2. 소설집에 담긴 다섯 편의 이야기는 소재나 배경, 스타일에서 분위기를 달리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입지는 유사하다.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단절, 고독, 권태, 무질서, 획일주의, 고갈, 파국, 죽음 등의 단어들이 연상된다.

 

3.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 30권 째인 이 책을 통해 작가 토머스 핀천을 스터디하는 시간을 갖는다. 1937년생으로 팔순을 내다보는 미국의 현존 작가이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3년 첫 장편 브이를 발표하여 문단의 극찬을 받았고 그해 출간된 최우수 데뷔소설에 주는 윌리엄 포크너 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두 번째 장편 49호 품목의 경매를 발표하여 리처드 앤드 힐다 로젠탈 상을 수상하였으며, 1973년 세 번째 장편 중력의 무지개를 발표하여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였다. 그밖의 장편으로 바인랜드』 『메이슨과 딕슨』 『그날에 대비하여』 『고유의 결함』 『블리딩 에지등이 있고, 소설집으로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있다.

 

4.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네 편은 작가가 대학에 다닐 때 쓴 것이고, 다섯 번째 작품인 은밀한 통합은 습작생을 뛰어넘어 신인 작가의 작품에 가까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힌다. 작가가 이 단편들을 다시 읽었을 때 그의 첫 반응은 한 마디로 오 맙소사였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신체증상이 동반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들었던 두 번째 생각은 완전히 다시 쓰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충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작가는 중년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그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5. 이슬비(The Small Rain)는 작가의 첫 단편소설이다. 작가가 해군에서 복무 중 육군에서 군 생활을 한 어떤 친구가 전해진 이야기가 테마다. ‘바깥의 중대 구역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익어갔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뜨겁다. 틈틈이 페이퍼백을 읽는 병사들도 묘사된다. 나 역시 군 생활 중 GI 들이 큼지막한 엉덩이 뒷주머니에 페이퍼백을 찔러넣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봤다. 섬에 위치한 크리올이라는 작은 마을이 허리케인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대민 지원을 나간 군인들의 이야기다. 그 와중에도 역시 허리케인 같은 원 나잇 스탠드 사랑이 펼쳐진다.

 

6. 엔트로피는 단편 소설로 엮기엔 다소 무리한 소재다. 작가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며 작가로서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단편 덕분에 작가는 엔트로피에 대한 전문가처럼 알려지게 된 것을 쑥스러워한다.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이 단편은 헨리 애덤스의 교육과 노버트 위너의 인간의 인간적 활용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단편에 비트 제너레이션을 그리고 있다. 비트 정신에 과학을 입힌 것이다. 인류의 절망과 죽음과 재앙에 대한 염려를 담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시간은 19572월 초이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작가는 이런 말을 담고 있다. “인간의 생각이 열에너지처럼 더 이상 이동하지 않는 일종의 열역학적 죽음이 인간의 문화에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일이 초래되는 이유는 생각의 각 지점들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갖게 되고, 그리하여 지적인 움직임이 중단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 토머스 핀천에게 흥미로운 점은 그가 수십 년 동안 은둔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은 고등학교 때와 해군복무 시절에 찍은 두어 장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출판과 관련된 외부 업무는 모두 대리인을 통해 처리하므로 그의 외모나 거처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핀천이 공식적인 활동을 극도로 꺼리는 탓에 생긴 일화가 많다. 유명한 일화로 중력의 무지개가 아이작 싱어의 소설집과 함께 전미도서상 공동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을 때 그는 몇 차례 수상을 거절하다가 결국 공동 수상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상을 받기로 하지만 유명 코미디언을 시상식에 대신 보낸 일이 있다. 핀천이 이렇게 은둔 작가의 길을 고집하게 된 이유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추측이 난무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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