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육필시집
백무산 지음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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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 오는 아침은/ 설날만 같아라// 새 신 신고 새 옷 입고/ 따라나서던 눈길/ 어둠 속 앞서 가

던 아버지 흰/ 두루막 자락 놓칠세라/ 종종걸음 치던 다섯 살/ 첫길 가던 새벽처럼// 눈 오는 아

침은/ 첫날만 같아라// 눈에 젖은 대청마루/ 맨발로 나와/ 찬바람 깔고 앉으니/ 가부좌가 아니라

도// 살아온 흔적도 세월도/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흰 눈송이 같은데// 투둑, 이마를 치는/ 눈

송이 몇// 몸을 깨우는 천둥소리// 아, 마음도 없는데// 몸 홀로 일어나네/ 몸도 없는데/ 마음 홀

로 일어나네// 천지 사방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누가 설하는 무량 법문인가// 눈 오는 아침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아라      - '초심' 전문

 

....첫눈을 초심으로 받아 들인 시인의 마음이 맑습니다. 올해 역시 첫 눈이 내리자 SNS에선 난리

가 났었지요. 시니컬한 사람들은 별걸 갖고 호들갑을 떤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내 단점과 결점을 덮어주고 위로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뭏든 새로운

기분이 들게 해줍니다. 시인은 한 술 더 떠 눈오는 아침이 설날 아침 같다고 합니다. 눈과 초심을

한 마음에 담습니다.

 

우리 살아가며 마음도 없는데 몸이 앞서가거나, 몸은 준비가 안 되었는데 마음이 앞서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눈 오는 아침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다는 말이 백미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에게 새 아침은 내가 아직 못 가본 길이고 못 살아 본 삶입니다.

비록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시간은 어제의 그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늘 새롭게 시작해야겠지요.

 


2.  모내기를 끝낸 들판에 어둠이 내립니다/  저녁뜸에 자던 바람이 문득 우수수 벼를 쓸고 갑니

다/ 국도를 바삐 달리는 키 큰 화물차들의 꽁지에/  하나둘 빨간불을 켭니다/ 논공단지 여공들이

퇴근 버스를 기다리는 길가/ 들을 가로질러 뜸부기가 뜽뜽 울며 납니다/ 베트남에서 온 여공 하나

가 작업복 잠바에 손을 찌르고/ 고향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 하늘

에 주먹별 하나 글썽입니다// 서녘 먼 곳으로 가 버린 사람아/ 그대 없는 이곳이 내게도 먼 이국

입니다                     -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전문


모내기를 끝낸 들판을 바라보며 웬지 마음 한 켠이 무겁습니다. 어찌 그렇게 매정하게 싹뚝 잘라

버렸는지 모릅니다. 논흙이 뒤집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어여 눈이라도 내려

서 덮어주면 따뜻하려나 생각합니다. 타국에서 온 여인이 이국에서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 짓

는거나 아무리 기다려도 올 수 없는,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곳이나 그저 먼 땅입

니다. 마음에서 찬바람 일며 눈가가 뜨가워지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3.  지난주에 읍내 장에 나가 하나뿐인/ 쬐그만 책방에 가서 이상국 시집 한 권/ 주문을 하고 오

늘 장날에 들러기로 하였는데/ 일을 보고 나니 남은 돈이 책값뿐이다// 책방 옆에는 묘목장이 열

렸다/ 꽃샘추위 황사 바람 부는데/ 앵두나무 사천 원, 자두나무 오천 원/ 홍매화 육천 원 계수나

무 만 원/ 꽃사과 목련 배나무 사천 원/ 시집 한 그루 오천 원//  한 그루밖에 살 돈이 없는데/

무얼 어디다 심을까/ 나는 이미 속이 상해 있었다/ 지난번에 사다 읽은 나무들 때문에/ 마음 밭을

버리고 봄을 버렸다// 나무들은 땅에다 심지만 우리들 마음과/ 대지 사이에서 뿌리내리고 꽃을 피

운다// 천지 사방 흩어진 몸들은/ 나무를 통해 마음으로 돌아오고/ 세상에 지천으로 흘린 마음들

은/ 나무를 통과해 몸으로 돌아오는데             - '마음에 심는 나무' 전문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있는 곳 겨울은 눈도 많이 안 오고 그리 춥지도 않게 지난 듯 합니다.

날씨가 포근해지니까 개구리들이 때를 잘 못 알고 경칩 보름전부터 동면에서 깨어나 그새 짝짓기

를 해서 알을 낳았더군요. 묘목상들도 바쁜 나날을 보낼 때가 온 듯 합니다. '시집 한 그루 오천

원'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머뭅니다. 책을 읽는 것은 내 마음밭에 씨를 뿌리고 어린 묘목을 심는

것과 한 가지겠지요. 더러는 그 씨앗이 말라붙고 더러는 잎을 티우고, 묘목들도 자라겠지요. 살아

가며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나를 보듬어 안아주겠지요. '천지 사방 흩어진 몸들은/ 나무를 통해

마음으로 돌아오고/ 세상에 지천으로 흘린 마음들은/ 나무를 통과해 몸으로 돌아'온답니다.

 

4. 시인 백무산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입니다. 1984년에 [민중시]紙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

습니다. 시인의 시는 농촌의 서정과 노동자의 일상을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날카로움은 독자의 의식을 해치려는 의도보다는 깨어있길 바라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마음자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시인은 상(賞)에 무심하리라 믿지만 어쨌든 시인은 이상문학상을

비롯해 여러 상을 받았더군요. 이 시집 외에 7권의 시집이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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