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와 너가 저지르고 사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뭐 그렇게까지?' 또는 '최소한 이렇게는 해야지!'이다. 70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여성 에리카 종은 후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쓰고 살아야지.'를 느낀다. 물론 그녀의 말이 아니고, 내 생각이다.
2. 자전적 소설을 읽을때는 특히 마음문을 활짝 열어줘야 한다. 쓰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마도 썼다 지웠다 할 수도 있다. 이것 빼고 저것 빼다가 아무 것도 안 남자 그만 포기하고 다 쏟아놓았을 지도 모른다.
3. 이 책 비행공포(Fear of Flying)가 출간 된 것은 1973년이다. 올해 꼭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지금 읽어도 '어허~' 하며 읽어야하는데 아무리 동,서양이 성(sex)과 적나라한 솔직함을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큰 반향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표현이 이해된다.
4. 책을 펼치자 도발적인 문장이 시선을 잡는다. "꿈의 학회 혹은 '지퍼 터지는 섹스'로 가는 길". 소설 속에서 이사도라라는 이름만 바뀐 작가는 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117명의 정신분석 전문의와 함께 한다. 그 중엔 작가의 두 번째 남편도 섞여있다. (써 놓고 보니 이 표현이 적절하다. 이사도라의 남편은 그 많은 남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5.모름지기 작가는 관찰력과 상상력이 뛰어나야한다. 그 다음엔 표현력이 요구된다. 에리카 종은 이 모두를 갖추었지만, 특히 관찰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람들에 대한 묘사. 그들의 내, 외면의 모습을 어찌 그리 섬세하고 리얼하게 묘사했는지 감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모두 실존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에리카 종의 가족들, 친구들, 전 남편, 그녀와 사랑을 나눴던 남자들.('사랑'이라고 쓰고 '섹스'라 읽는다). 여전히 그녀는 세번 째, 네 번째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낱낱이 담은 소설을 속속 출간하고 있다. 내 모든 것이 까발려지지 않기 위해선 그녀와 거리를 둘 일이다. 그녀의 남편들은 이를 각오하고 그녀와 결혼했을까. 얼떨결에 당했을까 궁금해진다.
6. 이 소설 속에 자리잡은 그녀의 남편은 베넷이다. 자유분방한 섹스 라이프를 추구하는 여인이 또한 결혼생활의 공백을 감당못하는 것도 아이러니 하다. 대담한 듯 하면서도 사실 이 여인은 여린 편이다. 포비아도 의외로 많다. "나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공포를 갖고 있다. 비행기 추락, 성병, 유리가루를 삼키는 것, 식중독, 아랍인, 유방암, 백혈병, 나치, 흑색종...., 아무리 건강한 것 같아도, 통증이나 상처가 전혀 없어도, 성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7.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뜨거운 열정을 그녀의 몸 안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마음 안에만 쟁여놓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외면되고 묻히는 것이다. 그녀에겐 '진상'으로 표현 될 수도 있는 그 진실. "진실을 말하는 건 위험하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게 [비행공포]가 그랬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는 무척 두려웠고, 책이 출판된 직후에는 열렬한 찬사와 날선 비난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솔직함이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로 인해 감옥에 갈수도 있기에. 그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작가는 오래갈 수 없다." _에리카 종
8. 최근 외국의 어느 여류작가(대학교수이기도)가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책을 출간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결혼도 했지만, 어느 유부남과의 사랑이야기를 가감없이 옮겼단다. 그녀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만 쓴다." 용감한 여인들이다.
9. 나는 이 책에서 에리카 종의 두 열정을 본다. 사랑에 대한 열정과 문학 즉, 글쓰기의 열정이다. 대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하여 이 소설이 발표되기 전 1971년 첫 시집 [과물과 식물] 등 다수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한 명씩 연구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고 그들이 어떻게 한 작품에서 또 다른 작품으로 변화해갔는지 연구했다. 여러 작가의 스타일을 몇 달 동안 모방해보기도 했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묻어 있는 부분이다.
10. 소설에는 국내 웹서점 어느 곳에서 틀림없이 걸어 놨을지 모를 금기어가 자주 튀어나온다. 그래서 못 옮겼다. 옮긴이는 이런 말을 했다. "고백하건대, 이사도라가 언급하는 작품들, 작가들, 사건들을 조사하고 각주를 다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거칠고 대범한 그의 언어를 적절한 수위의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말미에 작품 해설겸 추천사를 쓴 스티븐 캐프너 교수는 이 책이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를 제대로 옮긴 최고의 번역본이고 유일하게 읽을 만한 번역본이라는 말을 했다. 이에 적극 공감한다. 80년대 중반 읽었던 조악한 번역본(일본책을 중역한 듯한)을 접했던 기억에 비하면 이 책은 진짜 제대로 된 책이다. 참, 그리고 그녀가 이 책에서 겪은 현재 상황은 20대 후반의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