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장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육필시집
신경림 지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1)  폐광(廢鑛) /그날 끌려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 소리개차가 감석을 날라 붓던 벼력 더미 위에 /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사월 / 지까다비를 신은 삼촌의 친구들은 /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켰다./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 밤이면 숱한 움막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서/ 칸델라 불이 흐린 뒷방에 박혀/ 늙은 덕대가 접어준 딱지를 세었다./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 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사라져선 돌아오지 않았다./ 빈 금구덩이에서는 대낮에도 귀신이 울어/ 부엉이 울음이 삼촌의 술주정보다도 지겨웠다.


광복절에 이 詩를 읽고 옮기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이 詩의 시간적 공간은 일정시대 막바지인 1945년으로 짐작됩니다.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사월. 다시 4개월이 지나 8월이 되어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마을 젊은이들은 돌아올 생각을 안하는군요. 아니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길을 가고 있는게지요. 신경림 시인이 1935년 생이니까, 아마도 어린 시절 그 기억을 더듬어 쓴 詩인가 봅니다.



2) 유아(幼兒) / 1/ 창밖에 눈이 쌓이는 것을 내어다보며 그는 / 귀엽고 신비롭다는 손짓을 한다. 손을 흔든다./ 어린 나무가 나무 이파리들을 흔들던 몸짓이 이러했다.// 그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까닭을, 또 거기서 아름다운 속삭임이 들리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 - 충만해 있는 한 개의 정물이다.// 

2./ 얼마가 지나면 엄마라는 말을 배운다./ 그것은 그가/ 엄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다.// 꽃, 나무, 별,/ 이렇게 즐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배워가면서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하나하나 잃어버린다.//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그는 완전한 한 사람이 된다.//

3./ 그리하여 이렇게 눈이 쌓이는 날이면 그는 / 어느 소녀의 생각에 괴로워도 하리라.// 냇가를 거닐면서/ 스스로를 향한 향수에 울고 있으리라.


 시인의 심상에 비춰진 객관은 언어로 표현되면서 그 비밀이 없어진다는군요.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아이가 말을 배워나가는 것은 한 단어 속에 함축된 의미만 담게되지요. 다른 시인의 표현처럼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 작은 손 안에 움켜 쥘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듯이 한 단어 속에 깊은 의미까지 모두 안을 수는 없지요. 비밀을 전부 잃어버리는 날,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면서 우린 그저 울고만 있을 수도 있지요.



3)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 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요즘은 가본 지도 오래 되었지만, 노래방 가서 마이크를 잡게 되면 부르는 첫 곡이 양희은의 '한계령'입니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대목에선 공연히 목줄기가 뜨거워집니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하는 부분에서 그래도 나에게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계장터'는 신경림 시인의 이 시집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구름과 땅의 바람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잡초를 일깨우는 잔바람도 소중합니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는 부분에선 비록 살아가며 무릎을 굽힐 때도 있겠지만, 마음까지 바닥에 내려놓지 말라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석삼년에 이레쯤 천치가 되어 떠돌이도 되고, 바람도 되고, 잔돌이 되어 살아간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내 몸과 마음에도 생기가 돌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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