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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1. 책이 풍기는 포스가 예사롭지 않다. 책의 제목, 마치 춤을 추듯 날아오른 글씨, 그리고 사.무.치.다..는 표현까지 그렇다. "뭘 봤으니까 저 수선을 떨겠지." 도대체 뭘 봤을까? 그리고 봤다치고 표현할 능력과 재주가 없으면 그만일텐데 그 무엇일까? 궁금점에 불이 붙는다. [노름마치]라는 책의 제목만 보고 '노름'이라는 것을 연상해서 얼핏 이 땅의 역사상 대단한 '겜블러'에 대한 내용인가도 생각했다.
2. [노름마치]라는 뜻이나 제대로 알고 책속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저자가 책머리에 독백처럼 풀어놓은 글 중에서 그 뜻을 알아본다.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라고 한다. 곧 그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마쳐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고 한다. 요즘 말로 바꾸면 '끝판왕'이다.
3. 책의 내용은 총 6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을 마당으로 표현하면 한 마당마다 세 분의 예인(藝人)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이 분들을 공연을 중심으로 또는 살아온 직업, 이 땅에서 비슷한 시기에 함께 호흡하던 분들을 모두어 한 마당에 모셨다고 한다. 많은 분들을 소개하다보니 한 분 한 분 깊이있게 소개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단다. 저자는..
4. 이 책에 소개되는 분들은 전통예술계에서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분들보다는 변방에서 묵묵히 본인의 길을 가던 분들인 듯 하다. 그 분들의 평균 연령이 80세라고 하니 저자가 참으로 바빴겠다. 만사가 그러하지만, 시간을 붙들어매놓고 할 수 없는 작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5. 각 마당의 이름. 그 명칭만 봐서는 감(感)이 잘 안 오지만, 이렇게 명명 되어있다. 예기(藝妓), 남무(男舞), 득음(得音), 유랑(流浪), 강신(降神), 풍류(風流)등이다. 아, 이렇게 열거만 해놔도 웬지 숙연해진다. 그 분들 한 분 한 분 만나보기도 전에 그 분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헤아려진다. 물론 그 분들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예(藝)의 한 끈을 붙잡고 살아오셨고, 살다 가셨음이 분명하건만 그래도 웬지 가슴이 애틋해진다.
6. "진작 좀 오잖구." 중고제의 마지막 소리라 이름 붙여진 심화영님을 만나본다. 여든아홉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국악교습소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자가 뵙기를 청하고 찾아가자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는 '춘향가'중 한 대목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중고제는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전승된 판소리라 한다. 2009년 11월 향년 96세로 별세하셨다는 대목이 이 분의 기록 마지막에 남아 있다.
7. 2번째 마당에선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을 만나본다. 예나 지금이나 춤추는 남자는 화제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우선 현 시대의 이야기부터 꺼낸다. 남학생이 '무용학과' 다닌다고 하면, 대뜸 '무역학과'로 알아듣는다고 한다. 애써 '무용학과'라고 힘주어 말하면, 힐끗 보며 피식 웃는다. 웃음이 덜된 짧은 '피식'에는 '멀쩡한 놈이 무용(無用)한 놈일세'라는 의도가 삽입되어 있다고 하니 흘러간 시간 속 그 분들의 삶은 어땠을까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마지막 동래 한량이라 소개되는 문장원 선생을 만나본다. 동래에서는 한 해를 춤으로 열고 닫아 삼백예순날이 춤판이었다고 한다. 문장원 선생은 그의 (춤)소질이 '못된 소질'이었다고 회고한다. 1990년 초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지만, 그 스스로 이름 붙인 못된 버릇인 춤을 통해 잊혀진 근육과 혈관을 일깨우며 발을 내디뎠고, 현역 춤꾼으로 다시 춤추고 춤 일을 보고 계시다고 한다.
8. 마지막 유랑광대 강준섭 선생. 선생은 전남 진도군에서 대대로 무업(巫業)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를 마친 열세 살에 무명 세 필을 훔쳐 여수를 향했다. 굿판에서 썩고 싶지 않았고, '당골네'소리보다 '예술'소리를 듣고 싶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긴 여정이 시작된다. 유랑단체에 합류되어 걸어온 삶의 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
9. 칼춤 곧 '검무(劍舞)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가 법도와 볼품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그 검무의 무대 중앙에는 김수악 선생이 자리잡고 있다. 그녀는 고령의 나이에 걷는 것이 두렵지만, 춤추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한다. 오장육부의 감각이 음악으로 움직이는지라, '춤 들린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10. 책을 통해 많은 예인(藝人)들을 만나봤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있고, 다행히 전수 받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가르침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시는 분들도 있지만, 예(藝)라는 것이 단지 가르침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라는 공간에는 6,000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이를 깊이 연구하는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반스는 전 세계 언어의 수가 10년 안에 50퍼센트 정도로 줄어 들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언어도 문화이고, 이 책에 소개되는 예인들의 소리와 몸짓도 문화이다. 그 문화들이 소리없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오직 물질에만 촛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삶이 되고 말것이라는 우려심이 생긴다. 이 책 [노름마치]가 그 분들의 '끝판 놀음'으로만 그쳐지지 않게 되길 간절히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