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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의 재발견 - 1년 내내 계획만 세우는 당신을 위한 심리학 강의
피어스 스틸 지음, 구계원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1. 만약 당신이 95%의 미루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을 미루지 마세요! 라는 멘트가 겉표지에 적혀있다. 그래서 읽어야겠다. 95%에 당연히 포함되기에 그렇다. 이 책의 저자 피어스 스틸은 '늑장심리학'(학문이 세분화되다 보니 이런 분야도 있다)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저자의 10여 년의 연구 성과를 담았다고 한다.
2. 저자에게 늑장이란 평생의 과제였다. 그 자신이 미루기 대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늑장 부리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독립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이고, 두 번째는 늑장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통합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최근에 개발된 과학적인 방법론인 메타 분석(meta-analysis)을 활용하고 있다. 메타 분석은 특정 주제에 대해 독립적으로 수행된 선행 연구의 일치하지 않은 결과를 취합하여 통계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3. '늑장'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 봐야겠다. 도대체 늑장의 정체는 무엇인가? 수많은 설명 중에서 간결하게 옮겨보면 늑장은 '제때 하지 않으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일을 미루는 것을 의미한다.'.
4. 늑장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보니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다. 안도현 시인의 '적멸'이란 詩다.
장독 항아리 뚜껑 위에 눈이 내렸다, 간밤에
뒤뜰에 누가 못을 파서 대여섯 포기 연꽃을 심었느냐
겨울 아침에 브래지어처럼 백련이 벙글어서 좋고
저 연꽃과 나 사이의 눈부신 거리를 거저 얻어 좋다
내 눈썹에다 겨자씨를 뿌리고 가는 북풍도 좋다
마른 풀덤불 잡기장에 참새야, 무얼 그리 총총 적느냐
엄한 원고 마감일을 넘겨야 비로소 시가 오는 습성이
좀 오래갔으면 한다, 오후에는 눈 녹은 물로 손을 씻고
저 연못으로 소금쟁이가 타고 갈 뗏목을 만들어야겠다
이 시를 옮긴 것은 '엄한 원고 마감일을 넘겨야 비로소 시가 오는 습성'이라는 구절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늑장에서 자유로운 직업군은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작가들이 그러하다고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도 그랬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늑장 부리기와 걱정으로 오전 시간을 보내다가 대략 오후 3시쯤부터 미친 듯이 초조함에 휩싸여 원고에 몰두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 한다.
5. 그러나 유명 작가들도 그랬는데 하면서 위안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늑장 부리기는 언젠가 내게 불이익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늑장을 부리는 사람들은 완벽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에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충족하기 위해 일을 미룬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키포인트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완벽주의는 완벽한 변명이다."
6. 저자는 늑장부리는 사람의 3가지 유형을 설명한다. 자포자기형, 매사에 흥미를 못 느끼는 타입, 충동적인 성향이 그것이다. 어찌보면 늑장이라는 단어가 발목을 잡는 것도 인간의 삶이 복잡해지는 과정 속에 나타난 현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세상이 이렇게 복잡해지고 피곤해지기 전에 인간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여유롭지 않았을까? 단지 날씨나 건강 상태만 심각하게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데로 사는 데는 별 불편이 없었을 듯 하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면 되지 않았을까? 욕구와 그때그때 해야 하는 행동이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 미래를 예상하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타고난 기질에 맞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된다. 자연의 섭리와는 무관하게 여름에 겨울을 걱정하고, 한창 젊은 나이에 노후대책까지 걱정해야 한다. 그러니 늑장 부리는 것에 크게 죄책감을 갖을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7. 그래도 기왕에 늑장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으니 좀 더 읽어보자. 늑장을 피우는 근본적인 원인이 인간이 현재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페이스북을 로그아웃 할 수 없다는 부류도 소개되고 있다. 페북내 '늑장 중환자'그룹(회원 수 1만 8천명 이상). '내 전공은 낮잠과 페이스북, 부전공은 늑장'(회원 수 3만 명 이상)이란 그룹도 있다고 한다.
8. 자, 그럼 저자가 권유하는 '늑장을 이기는 기술'은 무엇인가? 실패하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없기에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란다. 내가 하는 일은 소중하니까 미룰 수 없다면 사랑하라는 조언도 해주고 있다. 문득 '잡초를 사랑하기'가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달콤한 유혹의 결과는 언제나 쓰기 때문에 충동의 고삐를 잡으라는 말도 한다.
9.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가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늑장'에 대응하는 방법론을 꽤 많이 제시해주고 있다. 늑장의 정체가 파악된 것이 일차적인 수확이고, 두 번째로 늑장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라는 것이다. 너무 안달복달을 하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느긋하다 못해 태만한 상황까지 가서 나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 저자 역시 너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 놓은 것이 멋쩍었는지 슬쩍 한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웨일스의 방랑 시인 W. H. 데이비스의 詩다.
"그게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서 관조할 시간조차 없다면."
'게으름을 피우고, 경솔하고, 즉흥적이고, 엉뚱해져라, 우리 인생에는 이러한 특징을 위한 자리도 필요하다.' 라는 말이 덧 붙는다. 이 말이 마음에 쏙 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