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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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 방현희의 단편집. 7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낯설지가 않다. 작품의 공통점은 치밀한 구성력과 생동감 있는 물고기의 은빛 비늘이 햇빛에 반사되는 느낌이다. 아울러 표현력이 뛰어나다. 


2. "당신이 겪은 일 중에서 가장 기이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로 시작되는 '로스트 인 서울'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굴러온 룰렛 구슬로 묘사되는 그렉 안나가 주인공이다. 카지노의 룰렛 구슬이 굴러가는 곳은 구슬과 바라보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이 없다. 그저 매번 굴러갈 때마다 새로울 뿐이다. 아마도 우리의 삶이 그럴 지도 모른다. 주어지는 자극의 강도와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렉안나는 촉망받는 인재였다. 고국의 대학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어느 우수한 대학 정문으로 들어가서도 높은 점수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 이젠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어찌어찌하다가 방송에 출연하게 되고, 그렉 안나는 삶의 방향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된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써봐도 핑핑 돌아가는 룰렛 판처럼 한창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에 던져진 그녀는 이제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잃어버린 것은 그녀의 꿈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작가는 최소한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든다.


3. '세컨드 라이프'.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다. 아내와 중국의 가흥이라는 곳을 갔지만, 내 몸과 혼은 따로 노닐고 있다. 나에겐 그 거리의 구석구석이 모두 어제 일처럼 훈기가 돌지만, 아내는 힘들다. 이야기가 걷돈다. 나는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내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 난 여기 살았었어.   - 당신이 언제 여기에서 살아? 당신은 나하고 죽 함께 살았는데?   - 구 년이나 십년 전이야. 이제 모든 게 기억나.    - 정신 차려, 우린 한국에 살고 있고, 결혼 십육 주년 기념으로 여행 온 거야. 결혼 기념 여행이라곤 생전 처음이고, 우리가 언제 이렇게 한가하게 여행 다닐 새가 있기나 했어? 여긴 언제 왔다는 거야.  아내는 점점 '내'가 이상해지고 있다고 한다. 기가 막히다 못해 화를 낼만도 하다. 그래도 '나'는 형과의 묘한 신경전과 형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독자인 '나'는 화자인 '나'의 기억을 믿기로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형은 그 당시 시국사범으로 수배령이 내려져서 쫒기는 몸이었다. '나'의 혼은 분명히 형과 함께 했다. 그러니 이렇게 생생히 기억 날 수 밖에 없지.  - 기억 속의 유령인지,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내가 유령인지, 당신은 알아?


4. 어떻게하든 감옥에서 빠져 나가고 싶다. 일단 내 몸 속의 내장을 하나 둘씩 먼저 내보냈다. 순조롭게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남은 것은 빈 껍데기 뿐이다. 나가지도 못했다. '탈옥'은 완전 실패다. 그 실패의 기록이다. 치밀하게 계산했지만, 구멍 투성이다. 수인(囚人)이 되면 아마도 같은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병이 걸린다. '나'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 세 번의 수술을 했다. 첫번째는 편도선을 떼어냈고, 두 번째는 위궤양으로 위를 반쯤 잘라냈고, 세번째는 맹장을 떼어 낸 것이다. 물론 그 때마다 탈옥을 꿈꿨다. 밖에 크게 한 판 벌려 놓은 것을 챙긴후 영원히 잠적 할 계획이었다. 네 번째 시도를 했다. 완전 모험이다. 그런데 역시 실패다.  간수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말이다.  -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감옥을 빠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넌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네 내장을 송두리째 다른 곳으로 도망시킨다 해도.

어쩌면 우린 일상의 삶에서 이렇게 나를 탈출시키려고 무언가 내게 소중한 것을 먼저 내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예비역대령 루트비히 폰 트랍의 가족들이 하나 둘 ..차례로 지혜롭게 빠져나가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들은 새 땅을 밟았지만, 과연 이 시대에 새 땅이 있기나 한 건지..


5. 이어지는 단편들도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나, '후쿠오가 스토리'나..그런데 이 작가 실제로 요트를 많이 타 본 듯 용어와 분위기가 리얼하다. '로라, 네 이름은 미조'에선 작가들이 선뜻 다가서기 힘들어하는 인체 해부가 펼쳐진다. 대충 잘 묘사가 되고 있다. 사인을 밝히고자 부검대에 오른 그녀.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그녀. 스스로 '맨발의 이사도라'라는 아이콘을 붙였지만, 발레리나로 성공하기엔 상체가 너무 두툼하고 다리가 가냘픈 신체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대 무용으로 갈아탔다. 그러나 그녀에게 정작 부족했던 것은 신체적 결점이 아니라 '신체 깊은 곳으로 감정을 농밀하게 모을 줄 모른다'는 것이었단다. 


6.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외롭고 힘들다.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낯설지가 않다. 어쩌면 모양만 다소 다를 뿐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다. 방현희. 주목할 만한 작가로 내 마음에 담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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