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졸우교 - 소설 인문학 수프 시리즈 1
양선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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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이자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양선규 교수의 인문학 수프 시리즈 중 첫 권인 '소설'에 대한 이야기. 지은이는 독자가 이 글 전체를 한 편의 소설로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다. 장졸우교(藏拙于巧)라는 말은 '자신의 졸렬함을 기교로서 감추다'라는 뜻. 채근담에 나오는 장교어졸(臟巧於拙 : 교묘함을 졸렬함으로 감추다)을 패러디한 말이라고 함. 지은이는 소설도 아니고, 소설론도 아닌 이 책의 글쓰기가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 "킬링 필드, 고해(告解), 죄 많은 내 청춘, 그 순간 내게는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광주에서의 무력감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글쓰기 공부에 나서면서도 나는 그 단어들을 내 연습장에서 종내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2년 뒤, 어렵게 작가가 된 수상 소감 말미에 "문학은 나의 종교다"라고 썼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글쓰는 사람들에게 문학이 종교가 되는 것은 '쓸 만한 이유'이다.


3. "헤밍웨이가 주는 감동은 무엇보다도, 그가 묘사하는 '행동의 깊이'에서 나온다. 그 부분은 언제나, 단연코 압도적이다. 소설은 묘사라는 것을 그는 확실히 보여준다. 묘사의 힘이 모든 관념을 압도한다."  

묘사를 잘 한다는 것은 나의 일상에 배인 행동의 깊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치열한 관찰력과 함께 묘사에는 생명력이 부여되어야 한다. 대가는 공연히 대가가 아니다. 


4. "책의 진정한 가치는 보통 재독(再讀) 때 발견된다. 사람 만나는 이치와 같다. 초대면만으로는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초독(初讀)은 그저 상대의 얼굴만 알아보는 정도다. 첫인상이 좋다고 꼭 좋은 반려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살아 봐야 좋고 나쁘고를 알 수 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내용을 겪어봐야 제대로 책을 알 수 있다."  

나도 가끔 재독을 한다. 리뷰를 쓰면서 한 귀절쯤 인용해보고 싶어서 다시 꺼내본다. 그런데 읽으면서 느낀다. 이런 대목도 있었나? 그래서 책을 방출할 때마다 심사숙고한다. 다시 볼 수도 있는 책. 다시 안 봐도 될 책을 구분한다.


5. "대학 1학년 때 차라투스트라를 처음 만났다. 우연히 만났다. 아직은 많이 어리고 미숙한 때였다. 정을 나눌 친구, 사랑을 주고 받은 연인, 가르침을 줄 스승이 필요한 때였다. 차라투스트라, 그가 어떤 자격으로 내게 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때까지 책에서 무엇을 배운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승다운 스승도 없었다.(....)차라투스트라를 만나긴 했지만, 그는 종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직 내게 니체는 먼 그대이다. 내게 차라투스트라는 스트라우스의 음악으로 만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보통의 클래식은 처음엔 조용히 시작하다가 고조되다가 다시 잔잔해졌다가 치솟아 오르곤 한다. 그런데 스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으면 시작이 만만치 않다. 산에서 큰 바람을 일으키며 차라가 달려 내려오는 것 같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나무를 징검다리 삼아 밟으며 날아오듯 내려 오는 것 같다. 


6. "헨리 제임스의 소설 [정글 속의 짐승]은 한 남자의 불운과 불민(不敏)을 그린다.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통이 있다. 그는 늘 자신의 모든 행동은 결국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예감과 불안에 시달린다. 그는 한 번 지나온 길이 아니면 발을 내디디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앞장을 서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야 안전하다."  

이 증상을 요즘 병명으로 붙이면 '공황장애'쯤 되겠다. 의외로 주변에 이런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눈빛을 보면 안다. 시선이 한 군데 오래 고정되어 있지를 못한다. 그리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꺼려한다. 치료의 50 퍼센트는 그 사람 몫이다. 그래서 치료가 쉽지 않기도 하다.


6. "대학 1학년 때,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었다. 그 소설의 주제처럼 그때는 사랑과 야망 그 두 가지 주제가 내 인생의 전부인 양 여겨졌다. 그것 이외의 삶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희생이니 구원이니, 아니면 몰입을 통한 구도적(求道的)자기 실현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 인생 목록에 오를 때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의 존재를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랑과 야망을 제외한 것들이 내게 자리잡기 전에 팍팍한 일상이 먼저 들어온다. 나머지 것들은 안타깝게도 몸으로 때우던 시기를 지나서 이젠 몸을 좀 아껴야 할 때 슬금슬금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다. 이젠 어쩌라고? 그냥 받아들이며 살란다. 크게 놀랄 일도 화날 일도 낙심할 일도 없이 그냥 받아주란다.


7. 지은이가 소설, 소설가, 시인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버무려 써 놓은 글에 그저 몇 자  얹는다. 문학이라는 매개체가 있으니 크게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 시나 소설이나 모두 작가들이 영적,육적 에너지를 소진해가며 쓴 글들이다. 그들에게 힘을 주는 일(크게 기대도 안 하겠지만..)은 많이 읽어주고 느낌을 공유하면서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일이다. 글쓰는 사람들에겐 글 쓰는 일이 그들의 '종교'이기도 한다기에 더욱..그러면 독자는 신자(信者)가 되는 것인가? 문학교(文學敎)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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