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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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는 첫 문장에 주목한다. 너무 길면 재미가 없다. 짧으면서도 그 다음을 읽어보게 만드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점수를 줄 만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전직 여배우 아야미는 손에 방명록을 든 채 오디오 공연장의 두번째 계단에 앉아 있었다."


오디오 공연장이라? 낯설다. 우선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야미는 음향 기기 사이 어딘가에서 간헐적으로 라디오가 작동되며 나오는 음악소리를 듣는다. 우선 이 대목에서 군복무 중 겪었던 일이 오버랩된다. 70년대 중반. 휴가를 나가서 모아놨던 돈으로 카세트 레코더를 하나 샀다. 워크맨이 나오기 전이었다. 거의 노트북 크기의 그 기기는 오직 녹음 테입만 작동시켜 주는 기능만 있었다. 영어회화 테입을 한 질 사서 귀대후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어느 날 밤. 카세트 테입이 들어있는 줄 알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이던가?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조곤조곤 들려왔다. 웬일인가 싶어서 열어봤더니 아무 것도 없었다. 플레이 릴축이 돌아가면서 떠돌아 다니던 방송 주파수를 불러 들인 것이다. 그후 영어회화는 뒷전이고 테입없이 플레이만 누르고 라디오를 들었다. 나의 소중한 비밀이기도 했다. 


아야미가 라디오 소리를 들은 것은 아마도 환청이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뒤얽힌 음향기가 어드메쯤에서 그때 나에게처럼 떠돌이 주파수가 잡혔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극장장은 아유미가 라디오 소리를 듣는다고 하자.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혹시 뒤에 남게 된 소리의 그림자가 아닐까요?"  아유미가 있는 곳은 오디오 공연장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소리의 그림자.'


독순술(讀脣術). 아유미에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독순술이다. 독순술은 원래 청각전선에 이상이 생긴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키워지는 능력이다. 청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예민해지는 부분이다. 아유미의 청력엔 이상이 없어보인다. 그래도 뛰어난 독순술을 발휘한다. 덕분에 멀리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니 볼 수 있다. 


아야미는 우연한 계기에 한국 여인에게 독일어 교습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아야미의 이름을 부르기 싫다며, 독일어 교재 속에 등장하는 이름인 '눈먼 부엉이'라고 불러준다. 아야미는 '보이지 않는 식당'에서 직장 상사인 극장장을 만난다. 극장장이 만났다는 '김철썩'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작가가 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철썩'이라는 시인이 '철썩'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동기는 "자신이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그 대답으로 세상은 흙을 한 삽 떠서 그의 무덤에 퍼붓더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철썩, 철썩 흙이 그를 묻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아야미를 짝사랑하는 '부하'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소설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분히 몽환적이다. 하나같이 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부하는 아야미를 '시인 여자'라고 부른다. 소설에는 이란 작가인 서덱 헤더야트의 [눈먼 부엉이(The Blind Owl)]이야기가 등장한다.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마치 이 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작가인 배수아가 함축적으로 소개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모티브도 [눈먼 부엉이]에서 잡아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길을 잃었다. 누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문득 길을 잃지 않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잘 못 된 생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봐야겠다. 배수아의 이 소설은 심미적이다. 그냥 꿈꾸듯이 읽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문장은 책 말미에 해설을 붙인 김사과의 글이다. 


"왜냐하면 고독은 실패이기 때문이죠, 아야미."

 

그럴까? 고독이 실패일까? 그럼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고독은 고독 자체로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 이 땅에 살면서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독하니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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