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용기 도모생애교육신서 11
폴 틸리히 지음, 차성구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바른 용기는 올바른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생명력의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의 용기는 생명력의 기능이다. 생명력이 감소하면 결국 용기도 감소한다. 생명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존재의 용기를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신경과민적인 사람들과 신경과민적인 시기에는 생명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생물학적인 실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따라서 심신(心身)은 함께한다.
옛사람들은 ‘용기’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렸을까? 용기는 하나의 윤리적 실체(reality)지만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구조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기를 윤리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존재론적으로 고찰해야한다고 한다.

저자 폴 틸리히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철학가이며 신학자이다. 1886년에 독일에서 출생. 1912년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나치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한 1933년까지 독일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라인홀드 니버를 통해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1933년부터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후 퇴임하여 하버드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1962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퇴임하고 시카고 대학교로 옮겨 1965년 사망하기 전까지 신학을 가르침.

폴 틸리히는 그를 따르던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자들의 신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호칭은 사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국내의 시인 한 사람이 시를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읽히지 않는 시만 쏟아내는 시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는 더 이상 시가 아니다. 시인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신학자들끼리 주고받는 차원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많은 부분에 접근하지 못하고 관련성을 찾지 못하던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저자는 새롭고 역동적인 신학용어들을 창조하여 현대 사회가 지닌 불안의 위기를 진단했고, 신학을 학문에서 해방시켜 현대적인 담론 속에서 새로운 청중과 새로운 관련성이라는 두 영역에 전달해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1950년대에 예일 대학교에서 테리 재단(Terry Foundation)의 후원으로 열린 몇 편의 강연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는 미국문화와 종교생활이 가장 역설적인 시기라고 한다. 교회의 출석률이 급증하고 교회 건물을 신축하는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타임(Time)지는 이를 미국의 종교적인 ‘거대건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 당시 미국이 누리고 있는 신앙적인 부흥의 깊이나 영성에 대해 그리 확신하지 못했다. 이를 저자는 “종교속의 상실된 차원”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용기’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기긍정, 즉 자아가 자신을 긍정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자기 긍정이라고 한다. 용기와 대립되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죄의식과 정죄의 불안〉등이다.

불안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신학과 의학 사이에 있는 협력의 원리 가운데 몇 가지는 존재론적 분석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실존적인 불안은 의사가 의사로서 관심을 기울일 사안 - 비록 그가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하지만 -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유형의 신경과민적인 불안은 목회자가 목회자로서 관심을 기울일 문제 - 비록 그가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목회자는 실존적인 불안을 그 자체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존재의 용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의사는 신경과민적인 불안을 제거하는 존재의 용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해야한다고 한다. 저자는 불안증상에 대응하는 의사의 기능과 역할보다 목회자의 그것에 비중을 높이 두고 있다. 따라서 온전한 목회의 기능은 자신의 기능은 물론이고 의학적인 기능까지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긴 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의 마지막 챕터는 “용기와 초월”이다.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라고 되어 있다. 용기는 또한 비존재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존재의 자기 긍정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자아가 포괄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혹은 개별적인 자아성 속에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비존재의 불안을 떠맡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용기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용기는 존재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비존재를 초월하는 힘이어야 한다. 비존재는 운명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경험되며,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저자는 마르틴 루터를 예로 들고 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체계속의 객관적이고, 양적이고, 비인격적인 요소들을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위해 싸웠다. 그에게서 나타난 확신의 용기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루터의 모든 작품, 특히 그의 초기 저작들은 그와 같은 용기로 가득 차있다. 그는 계속해서 트로츠(trotz),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가 경험한 모든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자기 긍정의 힘을 이끌어냈다.  

저자는 ‘존재의 용기’에 대해 책 말미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 책의 내용을 매우 깊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 내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