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미러클 - 부를 찾아 떠난 아시아 국가들의 대서사시
마이클 슈만 지음, 김필규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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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경제 전문가들은 부의 이동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아시아권으로 넘어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실제로 그런 예측이 실현되었으며, 최근 국제 정세의 변화를 보면 앞으로도 아시아권의 경제 지도가 달라지리라 생각하고 있다.

50~60년 전의 아시아권 각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약함이 그것이다. 글쓴이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아시아 지역 특파원으로 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에 6년 이상 체류하고, 현재는 「타임」의 특파원으로 홍콩에 머무르고 있다. 아시아통 미국인 기자의 시각으로 본 아시아권 여러 나라가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는 일은 각 나라가 갈 길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각 나라 대통령, 기업가 등)만 약 60여명. 저자가 기자의 신분으로 직접 인터뷰를 한 사람의 이름만 40여명이 적혀 있다. 책은 “1997년 12월, 사무실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요원의 전화가 왔다.”로 시작되고 있다. IMF사태로 전국이 혼란과 낙심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한참 잘 나가던 대한민국이었다.

1950~60년대 아시아 경제는 스스로조차 먹여 살릴 수 없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다. 먹는 것이 귀하고 힘든 때였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후해서 아시아에 큰 바람이 일어났다. 먹고 살만한 정도가 아니라 경제 사정이 매우 좋아졌다.    

막연한 이야기보다 수치가 말해준다. 1965년 ~ 2007년 아시아 각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의 통계를 보면, 한국 150,46%, 대만 7,291%, 싱가포르 5,913%, 홍콩 4,352%, 일본 4,133%, 태국 2,515%, 중국 2,260%, 말레이시아 1,882%, 인도 764%, 인도네시아는 1969년 ~ 2007년 사이 2,257% 상승.

글쓴이는 ‘미러클’ -  믿을 수 없는 부의 증가라고 표현한다. 또한 아시아 각 나라들은 어떻게 부를 축적하게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점이라고 한다. 이들 아시아 국가들은 어떻게 기존 경제 이론을 무시하고 글로벌 경제의 선두로 나설 수 있었을까? 대관절 미러클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라는 질문이 이 책의 모티브가 되었다. 위의 사실을 해석한 학계에선 아시아인에게 어떤 특별한 것이 미러클을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시아의 문화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요소였다는 분석이다. 그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로 유교문화이다. 유교의 주요 덕목에 사회적 질서, 권위에 대한 존중, 관료주의 기술, 헌신적인 업무 · 교육 등이 있는데 그 모든 요소가 경제발전에 초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영국의 정치가 로데릭 맥파워는 1980년 “서양에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 발달에 기여한 것처럼 동아시아가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데는 유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경제성장을 이룩한 ‘아시아 모델’들의 공통점은 집권자가 대부분 경제성장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국가는 실패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중, 장기 계획 속에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다보니 정권을 잡은 사람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는 폐단과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의 어두운 면이 동반되었다. 한국에선 박정희,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그 대표적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한국이야기가 비교적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주로 거론된 인물은 박정희, 김대중, 김우중, 박태준, 정몽구, 정주영, 김정렴 등이다. 각 사람에 대해 대략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과 한국경제와의 연관성을 기자 특유의 예리한 시각으로 그려주고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책을 읽던 중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가운데 한 명인 완리(萬里, 94세)의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2010. 7.27)  현재 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직책을 갖고 있는 그의 장수 비결이 화제이다. 완리는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베이징에서 세력을 되찾을 무렵 그 수하로 있던 공산당 간부이다. 책에서 소개되는 완리를 통해 격동기 중국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1978년 겨울, 중부지역인 안후이 성의 당서기 완리는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페이시현 산난 인민공사를 찾았다. 굶주림에 지친 농부들은 그에게 각 농가들이 독립적으로 경작하던 ‘옛날 방식’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거인 같은 (인민)공사 안에서 병들고 지쳐있었다. 1980년도에 진행된 한 연구결과에서 중국농민 4분의 1은 연간수입이 33달러에 불과했다. 무언가 변화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개 지방 관료 주제에 농부들의 요구를 어떻게 들어줘야 할이지 알 수 없었다. 그 당서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농부들은 침묵을 암묵적인 승인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가 떠나자마자 공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공사의 생산담당 지도자는 성인 농부들에게 땅을 조금씩 나눠주며 개별적으로 경작하는 대신 수확의 일정량을 공동체에 내게 했다. 할당량 이상을 수확할 경우 이를 개인적으로 먹거나 내다 팔 수 있게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당연한 이 시스템이 당시 공산주의 중국에선 목숨을 걸고 할 만한 일이었다. 마오쩌둥조차 이를 금지했고, 주민들은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소문은 금세 퍼져 몇 달 지나지 않아 지역 내 다른 인민공사도 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완리는 중국 내에서도 가장 개방적이고 공격적으로 경제개혁을 추진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당 간부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숱한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완리는 고집스럽게 농민들 편에서며 개혁을 밀고나간 덕분에 결국 덩샤오핑의 재가를 받고 부총리로 승진된다. 그리고 그에게 국가 농업정책 전반을 책임지게 된다. 이러한 사례가 변신하는 중국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글쓴이는 책의 말미에 아시아권 나라들이 자체적으로는 미러클을 이룰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워싱톤과 미국 기업이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과 투자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하며, 버락 오바마 정부는 세계화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세계화로 인한 혜택을 지켜 줄 방안을 찾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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