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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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문 】 | 이산의 책 8

_조너선 스펜스 / 이산

 

 

“『천안문』은 오랜 기간 계속된 중국혁명의 의미를 혁명에 참가한 중국인 자신의 눈과 입을 통해 새겨보려고 쓴 책이다.”

 

「천안문(天安門)」은 중국 베이징(북경(北京)에 있는 청(淸)나라 황성의 남면 정문이다. ‘천상의 평화의 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책의 원제 ‘The Gate of Heavenly Peace’에도 그 의미가 담겨있다. 천안문은 그곳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과 유혈사태들을 바라보고 기억에 담고 있을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후 광장은 공산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집단적인 친정부 집회와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장소가 되었다. 좀 더 최근으로 와서는 이 광장에서 저항시위, 특히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976년 4월 5일에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군중을 탄압한 ‘제1차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고, 1989년 6월 4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과 시민들을 중국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킨 정치적 참극이 ‘제2차 천안문 사태’로 기록된다. 천안문은 천안문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조너선 D. 스펜서는 미국 예일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며, 현재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다. 저자는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혁명’을 키워드로 잡았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혁명의 주체가 되는 이들과 타자의 시선으로는 ‘혁명’이란 단어를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겠지만, 집권세력의 관점으로는 폭동이고 반역이 될 것이다.

 

저자는 중국혁명이 단순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중국혁명을 민족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과학적이고 낭만적인 혁명이었으며, 때로는 여성해방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중국 혁명을 청조 말기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같은 유학자의 세계를 시점으로 잡는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중국이 세계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어려운 과제와 씨름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아울러 이들은 입헌개혁과 대중 참여정치의 의미를 둘러싸고 고군분투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은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준다. 봇물 같은 애도의 물결에 놀란 공산당 정부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해 4월 청명절에 수십만 명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있는 혁명영웅기념비에 몰려들어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며 꽃과 시를 바쳤다. 1920년대와 1930년대처럼 이윽고 슬픔은 분노로, 시위는 폭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경찰과 군대가 출동하고 수많은 참가자들이 체포되었다. 구타, 방화, 폭행이 난무했다. 덩샤오핑은 비판을 받았으며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국내정치의 혼란과 분열상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말년에 황제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것은(적어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을 염두에 둘 때) 당시 상황이 고대 왕조의 분열상을 예시하는 듯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럴 듯했다. 1976년 주더(朱德)의 죽음(6월)과 마오쩌둥의 사망(9월) 사이의 몇 주 동안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되는 대지진이 탕산(唐山)시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약 7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지진은 과거 왕조 시절에도 그랬듯이 정변(政變)을 알리는 전조 구실을 했다. 마오쩌둥 사망 직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공개한 마오쩌둥의 유촉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는 취추바이와 실각한 덩샤오핑을 분파적 해당주의자라며 격렬히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유언장을 작성한 것으로 믿어지는 사인방은 몇 주일 뒤 반대파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다.

 

『천안문』의 마지막 장에선 베이다오(北道)와 웨이징성(魏京生)이 민주의 벽에서 상상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고 정부의 책임과 인민의 권리를 재구축하려고 노력한 1978년 초와 1979년 말을 다룬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청조 말기에 모험을 하다가 추방되었듯이, 베이다오와 웨이징성은 공산당 통치자들에 의해 추방되었다. (웨이징성은 감옥과 노동수용소에서 15년을 보내다가 국외로 추방되었다.)

 

중국혁명 또는 개혁이 탄압과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1895년~1900년 사이 중국의 근대적 개혁가들은 청조(淸朝)에 압력을 행사하여 과거 1,000년 동안 이루어져왔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정부와 교육의 체제를 변모시켰다. 청조는 입헌개혁가와 정치 혁명가들의 줄기찬 공격으로 급기야 1912년 무너지고 말았다. 청조의 몰락으로 새 정치제도가 도입되고 상상력이 풍부해지면서 문학, 예술 세계에는 새로운 표현양식이 선을 보이게 된다.

 

이 책의 기둥은 세 사람이다. 첫 번째 인물은 전통적 유교교육을 받고 19세기말 청조가 쇠퇴할 무렵 급진적인 개혁의 대변자 노릇을 하다가 정치적 실패를 겪고 망명생활을 한 뒤에 유토피아적 사변 속에서 삶의 애환을 달랬던 유학자 캉유웨이이다. 두 번째 인물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에 빠져든 뒤 1920년대 국민과 학생들의 좌절된 열망을 가장 명쾌하게 표출한 루쉰(魯迅)이다. 세 번째 인물은 청조의 멸망으로 등장한 해방된 ‘새로운 중국’이라는 세계 속에서 성장한 딩링(丁玲)이다. 작가이자 정치행동주의자인 그녀는 국민당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강요한 창작활동의 기준이 자신의 창작의욕과 얼마나 맞지 않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초기 여성혁명가 추진(秋瑾), 군벌군 출신 작가 선충원(沈從文),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취추바이, 서양에서 교육받은 쉬즈모와 원이뒤, 풍자소설가 라오서, 1970년대의 젊은 반항아 웨이징성과 같은 이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현재 중국은 어떠한가? 수많은 혁명가들의 유산은 어디에 있는가? 시진핑 3연임으로 중국이 다시 마오쩌둥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연임이 확실시 된 순간 후진타오 전 주석이 퇴장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자발적으로 나간 건지, 아니면 쫓겨난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 직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후진타오는 시진핑의 지시에 의해 끌려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중국내에선 ‘후진타오’의 검색이 막혀 있다고 한다.

 

시 주석이 당 대회 개막 연설에서 4차례 언급한 '공동부유(共同富裕)'와 관련해서도 국제사회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제창한 선부론(先富論·일부가 먼저 부유해진 뒤 이를 확산한다)의 현실적 한계를 넘어 경제 발전의 수혜를 전 국민이 공유하자는 게 공동부유의 본질이라고 중국 당국이 설명하지만, 서방에선 믿지 않는다. 중국인민들은 믿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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