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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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_한병철 / 김영사

 

 

 

1.

리추얼은 상징적 행위다. 리추얼은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들과 질서들을 반영하고 전승한다. 리추얼은 소통 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리추얼(Ritual)은 의례, 의전, 예전, 의식, 축제 등의 여러 의미로 쓰인다.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자기계발분야에선 반복적으로 행해짐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생활에 리듬감을 주는, 개인의 일상적 습관이라는 뜻을 담고 있긴 하나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리추얼과는 의미상 거리가 멀다. 나는 내 마음대로 리추얼을 이렇게 정리했다. ‘지속가능한 영육의 교감

 

2.

재독 철학자인 이 책의 저자 한병철은 다양한 시각으로 리추얼을 진단한다. 리추얼은 그리움이 향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리추얼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윤곽을 대비를 통해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의 사회적 병적 현상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침식을 우려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상황,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해방되는 다른 삶의 길을 모색해보자고 한다.

 

3.

리추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단정적으로 리추얼은 삶을 안정화시킨다고 한다. 생텍쥐페리의 말을 인용한다. ‘삶에서 리추얼은 공간 안에서 사물에 해당한다.’.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인간의 존재로부터의 독립성을 사물에 제공하는 것은 사물의 지속성(멈춤 가능성)이라고 한다. 사물들이 인간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임무를 띠었다는 것이다.

 

4.

고대의 전쟁과 현재의 드론 전쟁을 비교하는 대목은 다소 뜬금없는 느낌도 든다. 그리움을 향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면서 전사(戰士)들의 결투와 현대의 자동화된 전쟁, 규칙 없는 살인을 비교한다. 무분별한 살인과 자본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에서 원시적 문화들에서의 전쟁은 놀이의 성격을 띠었다고 했다. 싸움에도 규칙이 있었다. 오직 칼과 창으로 승부를 걸었다. 하긴 김두한과 시라소니 시절엔 오직 발과 주먹으로만 승부를 걸었다. 페어플레이다. 근대전은 생산학살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근대전은 주권적 놀이꾼들이 아니라 노동자-노예로서의 병사들에 의해 수행된다. 한술 더 떠 드론 전쟁은 리추얼적 맞대결로서의 전쟁에 본질적인 상호성을, 양자 관계를 완전히 없앤다. 공격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화면은 전쟁 상대가 아니다. 드론 전쟁은 인터넷 게임처럼 펼쳐진다.

 

5.

리추얼이 잘 정리가 되지 않으면, 코로나 이전과 이후, 마스크와 노마스크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 아날로그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비교해보는 것도 괜찮다. 컨택트 시대는 리추얼의 시대이고 언컨택트 시대는 책 제목 그대로 리추얼의 종말이다. 코로나가 리추얼의 종말을 앞당겼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음을 고백해야한다. 유명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10년 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의미심장한 퍼포먼스를 한 것이 오버랩 된다. 그것은 바라보기 리추얼이었다. 그녀는 3개월 동안 매일 8시간씩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1분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저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바라볼 뿐이었다. 퍼포먼스 중 22년 전 헤어졌던 남친(같은 행위예술가)이 백발이 되어 나타나 아이 컨택을 하자 나름의 룰을 깨고 손을 맞잡고 잠시 눈물을 머금기도 했지만, 퍼포먼스는 매우 감동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예술가와 눈을 마주치고 앉아 있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더러는 화를 냈다고 한다. 퍼포먼스 736시간 동안 무려 850만 명이 다녀갔다. 울음을 터뜨린 사람은 아마도 누군가 나를,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아이 컨택을 하고 마주한 적이 얼마만인가 싶은 생각도 있었을 테고, 예술가의 눈을 통해(타자의 시선을 통해) 그 자신 내면의 모습이 들여다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화를 낸 사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나는 타인의 바라봄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바라봄은 우리를 나르시시스적 고립에서 끌어낼 수 있어요.”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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