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 중국 민주 자유를 위한 간절한 외침
우쩐룽 지음 / nobook(노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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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 중국 민주 자유를 위한 간절한 외침

_우쩐룽(武振榮) / nobook(노북)


“그는 왜 중국을 탈출했는가”


1992년 8월 24일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가 이뤄진 날이다. 한중국교정상화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된다. 2007년 4월. 중국의 민주인사 5명이 한국 정부에 난민신청을 했으나 법무부가 난민인정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전례가 없기도 했거니와 여러 정황상 신중을 기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당연히 중국의 눈치도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난민 신청을 한 5명의 중국인은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기에, 수소문 끝에 평소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들의 인권과 권익을 대변하고 옹호해온 (조영선)변호사를 통해 무료 변론을 요청했다. 그리고 법무부와 지루한 공방전 끝에 난민신청 후 1년 반이나 지난 2008년 11월 14일에 난민지위를 차지했다. 이 책의 지은이 우쩐룽이 대한민국의 중국 정치난민 1호로 기록된 날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으로 온 것은 결국 자유의 나라 한국에서 나의 글과 사상을 마음껏 쓰고 발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도망자다. 나는 망명자다. 나는 자유를 갈구한다! 나는 자유를 열망한다! 나는 자유를 타는 목마름으로 찾는다!”


우쩐룽은 1949년 3월, 중국 섬서성 함양시에서 태어났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함양시 중학교의 홍위병 두목으로 활동했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 행해졌던 홍위병 열병식 때 모택동을 친견했다. 1968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해서 정치 교관으로 뽑혀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인류사에 있어 최고의 발전단계임을 해방군 병사들에게 교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때 도서관에서 동서양 사상서, 역사서, 철학서 등을 읽으면서 그의 의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중국은 공산주의와 공산당으로는 희망과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밀리에 반모택동, 반문화대혁명, 반공산당, 반전제주의, 반독재주의 그리고 중국의 자유와 민주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때 쓴 글이 800만자, 책으로 펴내면 약 30권 분량이었으나 중국에서는 당연히 출판할 수 없었다.


1994년 그의 나이 45세 때, 법규정상으로는 퇴직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중국은 일자리는 부족하고 일할 사람은 넘쳐나던 시절이라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 후 집에 들어앉아 글만 쓰다 보니 당장 먹고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2000년, 아내와 함께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심천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작은 PC방 카운터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일을 한지 2년 쯤 되었을 때, 저자는 그동안 남몰래 써온 원고들을 정리했다. ‘진안민’이란 가명으로 홍콩 상무출판사에 편지를 보내게 된다. “(...)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적극 참여한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문화대혁명의 관점과 견해’를 제시한 책입니다. 저는 〈문화대혁명〉이 모택동이 말한 ‘독재정치에 의한 무산계급 운동’이 아니며, 등소평이 말한 ‘전국적인 사회 대파동’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국내에선 반동사상범, 내란음모죄에 걸릴만한 위험한 내용에 틀림없다.


홍콩에 있는 출판사에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놓고 한 달 가까이 애타게 답장을 기다리던 어느 날, 답장대신 심천시 국가 안전국 과장이란 사람이 사복경찰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진안민’이란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변 위협을 느낀 저자는 이 일이 있은 후 바로 그 다음 날 심천을 떠난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고향집으로는 안가고 친구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중국 탈출 계획을 세우게 된다. 목적지는 한국으로 정했다. 다행히 그의 필명이 수배대상이었지 본명은 아직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았기에 여권 발급에서 중국 출국, 한국 입국에 별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한동안(지금도 그리 편하진 않겠지만)일상생활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1949년~1989년, 중국은 정치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국가였다. 어떤 사람은 중국을 ‘운동 왕국’이며 인민들을 ‘운동선수’라고 불렀다. 작은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대규모의 운동만 꼽아도 8, 9번이나 있었다. 반혁명진압운동, 토지개혁운동, 농업 합작화운동, 사회주의 개조운동, 대약진운동, 사회주의 교육운동(약칭 ‘사교운동’), 문화대혁명운동(약칭 ‘문혁’), 그리고 2번의 천안문 운동 등이 거의 3, 4년에 한 번 꼴로 있었다. 모택동이 7, 8년에 한 번 일어났다는 말은 오류가 있다.”


중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1966년 이전에는 〈문화대혁명〉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국에서 온 증인인 저자의 말로는 〈문화대혁명〉은 1963년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사회주의 교육운동〉이라는 〈문화대혁명〉의 전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문혁〉연구의 기원인 맥 파쿼 교수는 문혁의 시작은 1962년의 〈 7,000인 대회〉라고 했지만, 저자의 생각은 그 근원이 〈 연안 정풍운동〉이라는 것이다.


1963년 저자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끊임없이 심화되는 계급투쟁과 사상교육의 일상이 이어졌다고 회상한다. 그 무렵 대약진운동의 실패 여파로 대기근이 이어지면서 인민들의 원망과 불만이 고조되어가던 상황에 공산당 고위층 내부의 분열이 촉진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중국 공산당은 전 소련 공산당이 와해되고 나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이 모든 것들이 고위 간부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면서 학교에선 ‘사상투쟁수업’과 ‘계급투쟁수업’이 주요과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에 와서도 인터넷으로 500여 편의 중국 자유와 민주를 위한 글을 발표했다. 〈우쩐룽 문화대혁명(文革)〉, 〈우쩐룽 민주를 논하다〉, 〈우쩐룽 모택동을 논하다〉, 〈우쩐룽 문화와 종교를 논하다〉등이 있다. 『중국 민주운동 해외연석회의』한국지부 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저자가 글은 많이 썼으나 한국 내에서 번역 출간 된 책은 없다. 이 책이 처음이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중국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탈출하기 전에 비밀리에 숨겨놓았던 원고들과 일기장을 되찾기도 했다. 중국으로부터 온 원고들은 제본되어 법무부 담당관들의 책상에 놓여졌다. 법무부 당국자들에게 이 원고들이 저자가 난민신청을 하면서 주장했던 말들에 대한 ‘물적 증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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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28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인생이 정말 파란만장하네요. 우리 역시 저런 시절을 겪었지만 중국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한 것 같아요. 중국에서 비판자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쎄인트saint 2021-01-29 09:22   좋아요 0 | URL
예...목숨걸고 한국에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가족들과 떨어져있긴 해도..여전히 한국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