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

 _페터 한트케 / 문학동



이야기의 무대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시(서부 독일의 국경 근처, 잘차흐강의 양안에 있는 공업도시)에 인접한 탁스함이라는 마을이다. 가상의 마을이 아닌 실제 장소라는 것은 작가가 ‘탁스함이라는 곳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곳에 사는 동명의 약사나 인물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멘트로 글을 열기 때문이다.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탁스함’을 무대로 세웠다고 한다. 작가의 유년시절이 문화적으로나 생태적으로 척박한 벽촌에서 궁핍하게 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마도 유년시절의 고향 분위기를 탁스함에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다른 장소들과 달리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모든 방문객들로 한결같이 외면당하는 곳. 하룻밤 묵는 건 고사하고, 지나는 길에 잠시 들르는 사람 하나 없는 곳.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소설의 도입 부분부터 이러하다보니 등장인물들의 면모가 궁금해진다. 소외된 사람들, 나아가선 잊혀진 사람들이 아닐까? 결코 그 일상이 그리 녹녹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약사이다. ‘독수리 약국’이라는 이름의 약국은 그 지역의 중심에 속하고 있다. 주로 전쟁 후 이주해온 주민들로 이뤄진 이 마을에 미개발지의 보건소 역할에서 임시 주민회관으로도 활용되곤 했다.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약사는 약국을 벗어나서 마을을 돌아다니면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단지 복장 때문이 아니라, “탁스함의 약사는, 약국에 자물쇠를 채움과 동시에 더 이상 약사가 아니었다.”



약사는 아내와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소소한 일로 아내와 자주 부딪히던 중, 아내가 종종 집을 비우더니, 이젠 그 기간이 제법 길어졌다. “늘 그렇듯이, 혼자 집에 남아 더 이상 자기 영역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어지면,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고, 제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소설의 중심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어느 날 ‘어두운 밤(깊은 밤이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듯) 적막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느닷없는 충격을 받고 그의 입엔 자물쇠가 채워진다. 실어증이 오게 된 것이다. “실어증으로 생겨나 그 동안 쌓여 있기만 했던 또 다른 욕구마저 눈을 뜨거나, 폭발하거나 혹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왕년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적이 있는 스키선수와 한때 유명했던 시인과 동행이 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이미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는 점이다.



약사를 포함한 세 사람은 마침 ‘성모마리아 승천일’ 덕분에 이어진 연휴기간에 묻혀서 어느 마을의 축제 현장에 도착하게 된다. 마치 이런 과정들이 주인공의 의식 흐름처럼 진행되기 때문에, 현실인가 아니면 작가의 꿈인가 다소 혼란스럽다. “그러던 어느 날 밤바람 속에서 그는 실어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아주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계속 생각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니, 잘된 일이야. 결코 다시 입을 열지 않아도 돼. 이건 자유야! 아니 그 이상이, 아주 이상적인 상태야!”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는 정당을 하나 창설할까, 아니면 신흥종교를 만들까 생각하기도 한다. 너무 앞서가는 느낌이다. 벙어리들의 정당, 벙어리들의 종교? 까지 나아가다 곧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아니지, 홀로 서야 해. 묵묵히, 자유롭게, 그리고 마침내 당연히 혼자서.” 그러나 약사는 완전 혼자가 아니었다. 한 여인을 만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도 종종 언급이 되곤 했던 그 여인이다. 그리고 그의 입도 열린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 온 약사는 화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내 이야기 도중에 몇 가지를 그르쳤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뭔가 늦지 않고 제때에 하고 싶다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주제는 ‘말(言)’이었다. 아무 말 안하고도 (일시적이나마)살아가려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긴 하지만, 결국 언어는 관계와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에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약사가 말을 회복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다행이다. 또한 작가에겐 글이 언어이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의 작품은 『관객모독』후 두 번째로 읽는 작품이다. 좀 더 작가의 의식 세계(작품)로 들어서면 더욱 작가를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작가를 읽는 것이 되기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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