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중국인 이야기 6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6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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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 이야기 】   (6) 김명호 / 한길사

 

 

 

 

홍콩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송환법 철폐에 대한 시위가 11주째 접어들고 있다. 만약 시위가 계속되고 격화될 경우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 등 충돌이 벌어질 우려도 나오고 있다. 홍콩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중국 선전에 있는 한 종합운동장에 군용 장갑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위성에 잡혔다. 경기장 바깥 주차장에도 트럭 등 병력 수송용 차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집결해 있었다.

 

 

 

한편 중국은 선전을 글로벌 혁신도시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상하이 자유무역구 면적을 두 배로 늘리는 등 홍콩의 글로벌 허브 지위를 본토 도시인 선전과 상하이로 이양시키겠다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2개월간 타이완 이민이나 체류를 신청한 홍콩인의 수가 50% 가까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홍콩언론이 보도했다. 타이완인들 평안할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본다. 일본 패망 후 타이완은 50년 만에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감옥에 있던 항일청년들이 풀려났다. 대륙을 떠돌던 타이완 출신 항일 인사들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합국 태평양지구 사령관 맥아더가 타이완을 연합국 성원인 중화민국이 접수한다고 선언했다. 중국 전구(戰區) 최고사령관 장제스는 육군 상장 천이를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타이완 학련은 “조국을 영접하자”며 선전활동에 나섰다. 중공이 개입하기 전까지 타이완의 좌익 사조는 낭만적 사회주의 수준이었다.

 

 

 

행전장관공서(行政長官公署)는 타이완 전 성의 군사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했다. 국민정부는 타이완인을 믿지 않았다. “도처에 일본 글자가 난무하고, 하는 짓이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이 안 간다. 모국어도 잊은 지 오래다. 작가라는 사람들이 우선 일본어로 써놓고 모국어로 번역하는 꼴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며 무시했다. “사람 축에 못 든다. 일본의 노예들이다.” 타이완인들은 대륙에서 나온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르며 경원시했다.

 

 

 

하루아침에 과부촌이 된 마을

 

 

먼 옛날부터 푸젠 성 둥산도 퉁보촌은 타이완 어부들의 쉼터였다. 누적된 피로를 밥 먹으며 술 마시며 풀다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흔히들 타이완촌(臺灣村)이라 불렀다. 주민들은 고기잡이와 농사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항일전쟁 시절에도 화약 냄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공내전은 이 작은 어촌의 평화를 망가뜨렸다. 1950년 3월, 대륙에서 패배한 국민당군은 진먼도에 거점을 마련했다. 정예 2,700여 명을 둥산도에 투입했다. 당신 둥산도 주민은 7,000여 명이었다.

 

 

 

4월 말, 중국 인민해방군이 푸젠 성 전역에 깃발을 꽂았다. 5월 1일, 하이난도(海南島)를 장악하고 둥산도를 포위했다. 공격은 시간문제였다. 돌격명령만 기다렸다. 둥산도에 주둔해있는 국민당군도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주둔군 증병을 서둘렀다.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했다. 약 3,000명에게 국민당군 군복을 입혔다. 퉁보촌은 깡촌 중에 깡촌이었다. 외부 소식이 늦다보니 주민들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남자들은 바다에 나가고 여인들은 농사와 집안일에 열중했다. 5월 9일까지는 그랬다. 5월 10일 새벽 2시, 철수하던 국민당군이 퉁보촌을 덥쳤다. 마을 입구에 기관총부터 걸어놓았다.

 

 

 

퉁보촌 ‘과부 진열관’ 관장의 구술을 소개한다. “단꿈을 꾸던 주민들은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총검을 착검한 국민당군 사병들이 살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상부 지시로 호구 조사를 실시한다며 무조건 끌고 갔다.”

 

 

 

국민당군은 장정 285명을 마을 사당 앞에 집결시켰다. 그중 147명을 진먼도행 함선에 쓸어넣었다. 91명은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었다. 연령도 17에서 55세까지 다양했다. 그날 밤, 퉁보촌 여인들의 밤은 유난히 길었다. 동이 터도 남편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문이 귓전을 때렸다. “끌려간 남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국민당 군함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여인들은 어린애를 등에 업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평소 꼴 보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그날따라 남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섬 전체에 젊은 남자라곤 씨가 말라버렸다.

 

 

 

38년이 후딱 지나갔다. 퉁보촌 여인들은 국민당 가족이라며 박해를 받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보호를 받았다. 1987년 9월, 타이완 『자립만보(自立晩報)』기자 두 명이 둥산도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타이완촌이 과부촌(寡婦村)으로 바뀐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 세계에 퉁보촌 여인들의 비극을 타전했다. 이 두 기자는 타이완 정부의 허가 없이 대륙을 방문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38년 전, 17세 아들과 헤어진 노모가 임종 직전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도 공개됐다. “너를 몇 십 년간 기다렸다. 네가 워낙 보고 싶어서 죽지도 못했다. 지금 나는 깊은 병에 걸렸다. 너는 내 편지를 받을 방법이 없고, 나는 이 세상을 떠난다.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겠다. 태평 시절, 네가 처자와 함께 고향에 돌아와 내 무덤에 향 사르는 모습을 보면 그때 지하에서 눈을 감겠다.”

 

 

 

전쟁의 참상은 세계 어디나 동일하게 무겁고 슬프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그라져간 몸과 영혼들은 과연 어디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까? 그나마 살아남은 퇴역군인들은 고향방문이 허락되어 퉁보촌을 찾았다고 한다. 남편과 재회한 여인들의 소감은 한결같았다. “남편과 만났나?” “만났다.” “어떻드냐?” “늙었더라.” “가면서 뭐라고 했느냐?” “또 오겠다고 했다.” 남자들은 거의 본토에서 다시 결혼하고, 퉁보촌 여인들은 이제나 저제나 남편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다 독수공방 할머니들이 되었다.

 

 

 

 

 

"꽃과 책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꽃구경하는 사람과 책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뭔지 깨우치려면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꽃구경은 돈이 안 들지만 책에는 돈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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