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이야기 3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3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인 이야기 3 김명호 / 한길사 중국인 이야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어린 시절/ 향수는 작은 우표 한 장/ 나는 이곳에 있고/ 어머니는 저 건너에 있었다/ 어른이 되자/ 향수는 구겨진 배표 한 장/ 나는 이쪽에 있고/ 신부는 저 건너편에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향수는 작은 봉분 하나/ 나는 밖에 있고/ 어머니는 그 안에 있었다/ 지금의 향수는 좁디좁은 해협/ 나는 이쪽에 있고/ 대륙은 저쪽에 있다.”

 

 

대륙(중국 본토)에서 대학생활을 보낸 타이완 시인 위광중(余光中)의 향수(鄕愁)라는 시의 전문이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혁명정당으로 출발했다. 두 번에 걸친 합작도 북양군벌 타도와 항일전쟁 수행이라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통일문제가 숙제로 남았다. 1세대 지도자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성격부터가 판이했다. 장제스는 선제공격을 퍼부은 후에 평화적 해결을 제의했다. 마오쩌둥은 정반대였다. 항상 평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전쟁을 준비했다. 장제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중국공산당과의 접촉이나 담판은 자살행위다. 저들은 항상 평화를 내세우며 뒤로는 딴 짓을 해댔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1975년 장제스가 세상을 떠나고 장징궈가 총통자리를 이어받았다. 대륙에선 실각 후 복귀한 덩샤오핑이 권한을 잡았다. 덩샤오핑과 장징궈는 서로 옛 친구 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쉽지 않았다. 1988113일 장징궈가 급서하기 직전, 그는 타이완과 대륙 간의 얼어붙은 몇몇 정책들을 겨우 열어놓았을 뿐이다. 그 중 40년간 유지되어온 중국 본토의 대륙여행 금지령 폐지도 포함된다.

 

 

수염쟁이 영감, 혁명의 정신적 지주

 

중국인 이야기(3)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은 국민당 원로 위유런(于右任)이다. 이런 시를 남겼다.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대륙 산하를 볼 수 있는 곳/ 대륙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오직 통곡 뿐/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두고 온 내 고향 볼 수 있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 하늘은 아득히 창창하고, 들판은 끝없이 망망한데/ 산 위에 올라보니, 온 나라가 상중이다.”

 

 

국부 쑨원을 제외하고 대륙과 타이완에서 모두 추앙받는 사람은 위유런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 서방기자가 중국 여기자에게 위유런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가 아무리 설명해도 당신들은 이해 못할 사람이라고 했다. 중국인명사전위유런 편을 보면 이력이 화려하다. “민주혁명가, 정국군 사령관, 국민당 원로, 왕희지.안진경.조맹부와 함께 중국 4대 서예가의 한 사람, 대시인, 대교육가, 대언론인, 중국 기자들의 비조(鼻祖), 34년간 감찰원장을 역임한 중국 역사상 가장 청렴했던 고위 공직자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평민 복장으로 황제와 함께 자금성을 빠져나온 서태후는 심복이 순무(巡撫)로 있는 산시성 경내에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이 시안(西安)에 도착 하던 날, 산시 순무는 학당의 수재(秀才)와 거인(擧人)들을 거리에 동원했다(위유런도 학당에 있었다). 서태후가 지나갈 때까지 한 시간 동안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돌아온 위유런은 언젠가는 내 손으로 외국인들에게 이 땅을 내준 태후의 목을 치겠다.”며 혁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 살배기 젖먹이가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 19097, 위유런은 민중의 명령을 청하며, 엉뚱한 짓을 일삼는 것들에게 불호령을 내리겠다며 민호일보(民呼日報)를 창간한다. 청나라 정부의 실정(失政)을 매도하는, 위유런의 품위 있는 문장은 굉음(轟音)을 연상하게 했다. 창간 79일 만에 위유런은 감옥으로 끌려갔지만, 면회 온 기자들에게 신문을 하루도 거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선 사장 위유런을 빼오기 위해 신문을 폐간했다.

 

 

감옥문을 나선 위유런은 다시 신문을 발간했다. 신문이름도 바꿨다. 민우일보(民吁日報)였다. 두 눈을 잃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호()의 점 두 개를 뺀 우()로 바뀐 것 말고는 신문의 내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19091026,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청나라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에 금이 간다며 보도를 통제했다. 안중근 의사의 쾌거를 접한 위유런은 정부의 보도금지를 한 귀로 흘리고 조선 남아의 쾌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국을 침탈한 원수의 목에 총구를 겨눈 것은 당연하다. 중국인이 본받을 일이다.” 창간 23일 후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던 전 즈리 총독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안 의사의 의거를 최초로 보도한 위유런의 언론관을 높이 평가했다. 1년 후, 안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는 시를 위유런에게 보낼 정도였다.

 

 

평생 할 일을 단숨에 끝냈다/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다/ 백 년을 사는 이 없는 법/ 한 번 죽음으로 천년을 살 사람만주국 정권인 청나라 정부는 위유런을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 인쇄용지 공급도 차단시켰다. 위유런은 옥중에서 민우일보의 폐간 소식을 들었다.

 

 

또한 이번 책에서 관심이 갔던 부분은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이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북한을 이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우리는 중국을 잘 알고 있는가? 북한을 잘 알고 있는가? 그저 나의 생각에 상대방을 얹어놓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통일 한국을 위해서 북한은 물론 중국까지도 깊이 알아가며 통일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소년시절부터 습관이 안 되면, 늙어서 아무리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게 독서다. 취미가 독서라는 사람을 볼 때마다 슬프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치욕이 뭔지를 모른다. 가장 미련한 사람이다. 의사 말대로 하다 보니 며칠 간 독서를 못했다. 불안하다." _위유런(于右任)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