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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열린책들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좀머 씨 이야기 】
_파트리크 쥐스킨트 / 열린책들
“오래 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이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화자(話者)인 소년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회상조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소년이 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몸이 날렵했다는 이야기다. 소년은 나무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을 즐겼다. 워낙 나무에 오르기를 좋아하다 보니 나무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뒤통수(혹)는 믿을 만한 일기 예보기 노릇을 톡톡히 해서 나는 내일 비가 올지, 눈이 올지, 햇빛이 비칠지 아니면 폭풍이 휘몰아칠지에 대해서 기상 통보관보다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대문 앞에 걸린 ‘좀머 씨’는 언제쯤 등장하시나? 소년의 집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좀머 씨. 마을 사람들은 좀머 씨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현재 상황이다. 좀머 아저씨 부인이 작은 인형들을 만들어서 팔고 있다는 것. 직업이 없는 좀머 씨는 늘 걸어서 다닌다는 것. 걷는 사람 좀머 씨.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좀머 씨는 걷는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다. 그에겐 아무런 볼일이 없다.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고(버터 빵과 우비, 물이 든 배낭만 메고) 그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도 않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들르는 곳도 없다. 오직 걷는 게 일이다.
소년의 부모는 좀머 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있다. “좀머 씨는 밀폐 공포증 환자야”. 소년의 엄마는 말을 덧붙인다. “그 사람은 밀폐 공포증이 아주 심하단다. 그 병은 사람을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들지..” 내 주변에도 밀폐공포증 환자가 몇 사람 있다. 창이 없는 방에 있는 것을 못 참는다. 불안해한다. 창문을 열지 않더라도 창이 있고 없고에 따라 마음 상태가 달라진다. MRI 라는 검사 장비가 처음 나왔을 땐, 완전 밀폐형이었다. 그 후 ‘밀폐공포증’ 환자를 위해 창이 달린 MRI가 나왔다. 작가는 소년의 아버지 입을 빌려서 ‘밀폐공포증’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밀폐’란 닫음 혹은 고립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덧붙인다. 어쨌거나 좀머 씨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몸에 자주 경련 상태가 오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걸으면 경련이 감춰진다. “그래서 자기가 떠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걷는 거래요.”
좀머 씨와 이 책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오버랩 된다. 장편 소설 『향수』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은둔처를 옮겨 다니면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작가. 일체의 문학상을 거부하고 검박한 생활을 하는 그. 개를 무서워하고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탈 때면 신경이 무척 예민해지고 긴장하는 그. 비위생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는 것도 꺼려하는 그. (약간 아니 많이 결벽증과 함께 대인기피증이 있지 않을까 의심됨).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가차 없이 절교하는 그. 햇빛을 싫어해서 모든 창문을 가리고 사는 ‘철저한 은둔자’라는 대목에선 ‘밀폐공포증’은 아닐 것이라 추측된다. 좀머 씨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한 마디 한 말이 있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이 말 속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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