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 상 - 조선의 왕 이야기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 지음 / 소라주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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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 - 조선의 왕 이야기

_박문국 (지은이) | 소라주 | 2015-09-07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아직 논란이 있지만) 대통령들을 보면 한국의 현대사를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왕들을 보면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창업의 군주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루한 감이 없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 자체를 반대했기에, 마지못해 출정에 올랐지만 돌아올 구실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위화도 회군은 준비된 수순이었다. 물이 불어나 군대가 움직일 수 없으며, 군량미도 떨어져가기 때문에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하지만, 최영과 함께 한 우왕은 요청을 거부한다. 결국 이성계는 장수들을 모아 회군의 뜻을 밝히고, 회군은 시작된다. 회군은 곧 반란군이 된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개경을 향한다. 결국 권력은 이성계에게 넘어온다. 이성계의 정책에는 정도전이 추구한 사상인 성리학적 왕도정치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말로(末路)는 측은한 마음만 들뿐이다.

 

 

나는 매주 한 번씩 방배역 사거리에 있는 청권사 앞을 지난다.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태종의 속을 어지간히 뒤집어놨던 양녕대군에 비해 효령대군은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종의 셋째 아들이자 한민족 역사상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은 사실 왕이 될 가능성이 희박했던 인물이다. 첫째를 지나 둘째도 건너뛰고 왕통을 이어받은 세종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세종이 그의 뜻을 한껏 펼친 것은 태종이 상왕으로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면서 뒤를 봐주었고, 조선 역사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쿠데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은 세종의 최고 결과물은 훈민정음이다. 흔히 세종이 새로운 글자를 개발하라고 어명을 내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밤을 세워가며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지은이의 논지대로 세종 혼자서 밀실작업을 통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당시 여러 정황을 참고해 볼 때). 비록 세종이 화폐개혁에 실패하고, 북방개척을 위해 사민정책을 추진하는 과정 중, 중부, 남부지방의 백성들을 동토의 땅으로 강제 이주시킨 냉혹한 면도 없지 않으나 세종의 치세는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표현이 무리가 아니다.

 

 

조선의 10대 왕으로 기록되는 연산군 이융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연산군은 조선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폭군으로 통한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하다. 성종 사후 즉위 초 연산군은 나름의 치적을 남기고 있지만, 삼사의 대간 세력들과 계속 충돌이 발생하면서 결국 칼을 빼들게 된다.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모두 연산군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사화(士禍)는 사림이 화를 입는다는 뜻이다. 연산군의 폭정은 아무래도 그의 친모인 폐비 윤씨에 대한 보복성이 짙다. 연산군이 현 시대를 살았다면, 뇌의 기질적인 병인(病因)을 밝혀내기 위해 MRI를 찍어봐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로 분노조절장애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간원, 사헌부와 같은 삼사라는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처참하게 잃는 등 비극적인 개인사를 갖고 있지만 그가 벌인 폭정의 도가 너무 지나쳤기에 현재까지도(앞으로도) 옹호 받지 못하는 군주이다. 언론을 통제하는 권력과 연산군이 매치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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