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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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이반 일리치 / 현암사

 

 

1.

책을 펼치자 낯선 용어들이 고개를 든다. 인시피트, 아욱토리타스, 스투디움, 디스키플리나, 사피엔티아, 루멘 등 전혀 듣도 보도 못하던 단어들이다. 공통점은 책 읽기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2.

이반 일리치가 이 책을 쓰기 위해 텍스트로 삼은 것은 디다스칼리콘이다. 디다스칼리콘12세기 대수도원장이자 학자였던 성 빅토르의 후고가 1128년경에 쓴 독서법에 관한 책이다. ‘디다스칼리콘은 그리스 언어로 공부’, ‘학습을 의미한다.

 

3.

후고의 글은 그의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따르는 공동체에 살았다. 그는 스승의 텍스트들을 읽고, 또 읽고, 필사했다. 책이 귀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후고에게 읽기와 쓰기는 같은 범주였다. 또한 후고의 사상에서는 타락한 인류가 지혜와 재결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중심을 이룬다. 이것이 후고를 이해하는데 핵심인 레메디움(remedium), 즉 약이나 치유개념이다.

 

4.

일리치는 이렇게 묻는다. “읽는 사람이 과시를 목적으로 지식 축적을 추구하지 않고 노력을 통해 지혜로 나가려 할 때 익혀야 할 습관을 형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고의 생각을 답으로 제시한다. “읽는 사람은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

 

5.

일리치는 어떻게 책 읽기에 관한 텍스트를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선택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책읽기의 현 세태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후고 시대 이전의 학생들이나 수사들은 책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정독위주였다. 그러나 책이 많아지면서 이전에 수사들이 온몸으로 읽었던 책들은 학자의 읽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원 안에서 집단으로 낭독하던 읽기는 개인적인 묵독으로 바뀌었다. 포도밭으로 떠나는 순례와 같았던 독서는 점점 지식을 획득하는 공부에 가까워졌다.

 

6.

후고는 읽는 사람에게 그들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기쁨을 찾으라고 권한다. “나중에 어떤 것도 불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숨 막히게 하는 지식은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한다.” ‘숨 막히게 하는 지식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머문다. 그 지식은 분명 내 안에서 전혀 영적인 울림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읽는 사람이 이러한 습득을 갈망해서 앞으로 나아가길 권유한다. 그래야만 정신이 안정을 찾는다고 한다. 독서 생활에 큰 지침이 되는 이야기다.

 

7.

현대의 읽기, 특히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유형의 읽기는 컴퓨터나 관광객의 활동이다. 보행자나 순례자의 일이 아니다. 차의 속도와 도로의 따분함과 정신 사나운 광고판 때문에 운전자는 감각적 박탈 상태에 빠지며, 이 상태는 책상에 앉자마자 급하게 매뉴얼이나 정기간행물을 넘길 때도 계속된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학생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복사기로 간다. 그는 사진, 삽화, 그래프의 세계에 살고 있고, 여기에서는 채식(彩飾)이 있는 문자 풍경의 기억은 이미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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