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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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3부작-1 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_프랑크 디쾨터 저/고기탁 역 | 열린책들

원서 : The Tragedy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

 

해방이라는 이름의 폭력

 

2006년 여름 창춘에서 새로운 관개시설을 만들기 위해 도랑을 파기 시작한 인부들은 섬뜩한 광경을 목격했다. 기름진 흑색토가 사람들의 유해로 가득했던 것이다. 땅속 1미터 아래에서 수천 점의 해골들이 다닥다닥 붙은 채 발견되었다. 깊이 파들어 갈수록 유골들이 마치 장작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주민들은 엄청난 매장 규모에 놀랐다. 어떤 사람은 이들 유골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제 강점기에 희생된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했다. 연로한 한 남성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자들과 장제스의 국민당 사이에서 1945년을 기점으로 재개된 국공 내전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이 해방이었을까?

 

 

 

 

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 거둔 그들의 승리를 해방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해방의 의미는 밝아야 한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야 정상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해방과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코 평화, 자유, 정의와 상관이 없이 기록된다. 계획된 조직적 폭력과 공포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많은 인민이 희생을 치룬 중국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국공 내전으로 군인 사상자를 제외하고도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이 기간 동안에 대한민국도 격동의 시대를 겪어야했다. 1950년에는 6.25사변까지 일어났다.

 

1945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여된다. 동시에 스탈린이 일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한다. 8월이 지나가기 전에 일본은 중국에 공식적으로 항복함으로써 태평양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다. 뒤이어서 공산주의자들과 국민당 군대가 충돌한다. 공산주의의 중심에는 마오쩌둥이 있고, 국민당에는 장제스가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역은 마오쩌둥이다.

 

이 책이 갖는 의의

 

영국과 홍콩에서 중국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해 온 이 책의 저자 프랑크 디쾨터. 대단한 자료 수집력과 분석력의 소유자이다. 이 책에 제시된 증거들은 대부분 중국 공산당의 기록 보관소에서 나왔다.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나, 지난 몇 년 사이에 방대한 자료들이 공개된 사실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책에 실린 글들은 비밀경찰의 보고서, 수정되지 않은 지도부의 연설문, 사상 개조 운동에서 발췌된 자백서, 농촌의 반란을 둘러싼 사실 조사, 대공포시대의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 일반인들이 제출한 항의서 등을 포함하여 이전까지 기밀로 취급되던 수백 건의 문서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이외에도 혁명을 직접 겪은 목격자의 증언을 비롯하여 개인의 회고록, 편지, 일지 등의 자료들도 추가된다. 이들 초기 목격자들의 증언은 공산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동안 많은 부분이 부당하게 묵살되어 왔지만 이제 기록된 증거들을 통해 확인이 가능해졌고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그 생명력은 두 번 다시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아야한다는 의지도 담겨있다. ‘해방의 실제현장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해방이라는 이름의 폭력의 기록이다.

 

정복에서 반발까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의 정복, 장악, 숙청과 사상개조, 농노제 그리고 노동 수용소로 이어지는 통제의 시기를 거쳐 반발이 일어나는 과정이 시대 순으로 전개된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55000만이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의 집권 후 초기10년 동안 최소 5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불행의 늪에 빠진 채로 생명력을 잃어갔다. 20세기 최악의 폭정이었다.

 

다수의 지지를 얻고 소수를 반대하며 모든 적을 각개 격파하라

 

마오쩌둥이 한 말이다. 마오쩌둥은 비열한 야심가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파악해서 채워준 다음에는 그 이상을 빼앗았다. 목숨까지 포함된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평화, 정의, 민주주의 같이 사람들이 혹할 만한 이슈들을 내세웠다. 농민에게는 땅을, 지식인에게는 자유를, 사업가에게는 사유 재산의 보호를, 노동자에게는 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약속했다. 그러나 공약(空約)그 자체였다. 정권을 잡은 후엔 내가 언제 그런 말을?”이었다. 농민들은 농노제로, 공무원들은 각자의 소임을 다하도록 채찍질 한 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저자가 중국 공산주의의 역사를 약속과 약속의 파기로 점철된 역사라고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반발의 말로

 

마오쩌둥에 대항하는 반우파투쟁의 역사는 피로 물들어져 있다.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경 세력으로 낙인찍힌다. 사회주의 문화에 반대하거나, 사회주의 경제 및 정치 제도에 반대하거나, 정부의 기본 정책에 반대하거나, 인민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 건설에 따른 성과를 부정하거나, 공산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등의 행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인 실수에 해당되었다.

 

아이러니한 중국, 중국의 인민들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에서 신격화되어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신화도 빛이 바래지긴 하지만,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에선 여전히 상점이나 가정집 어디서든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붉은 색의 흐름. ‘홍커’(紅客). 중국 혁명의 성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객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찾는 대표적인 성지는 마오쩌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오쩌둥의 고향마을이자 옛집이 있는 샤오산10여 년 전부터 마오 주석의 혁명 흔적을 찾아 나선 붉은 여행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붉은 여행 열풍은 마오쩌둥 주석 탄생 120주년을 맞이한 201312월에 절정에 이르렀다. “마오 주석의 생가가 있는 후난성 샤오산을 방문한 관광객 수는 1천만 명을 넘어섰고 전 중국의 붉은 여행객이 8억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제시됐다. 이에 2년 앞선 2011년 중국공산당 창당 90주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빚어졌다.”

 

 

  “당신들 중국인에게 마오쩌둥 주석은 어떤 사람인가요?” “마오 주석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마오 주석은 영원한 영웅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혁명가지만, 실패한 집권자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마오쩌둥. 지금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은 중국건국의 아버지로 신과 같은 존재로 대접받고 있다. 어쩌면 이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국인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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