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p, 대한민국 표류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http://ozzyz.egloos.com/

 

 

 

  고시원 야간 총무 일을 하게 된 건 그야말로 필연이었다. 내게 그보다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학비에 집세에 연애질에, 내야 할 돈은 많고 가진 돈은 없었다. 이미 오전에 편의점, 오후에 카페 서빙, 주말에 텔레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나라도 더 해야 했다. 누가 고시원 총무 일을 해보면 어떠냐 말했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총무를 하면 방이 공짜다. 심지어 한 달에 20만 원에서 30만 원 가까운 수입이 생긴다. 이미 나는 고시원 생활만 2년째인 경력자가 아니었던가. 내 주위에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수소문한 지 이틀 만에 자리를 구했다. 문짝에 붙어 있던 구인 종이를 북 뜯어 손에 들고 원장실을 찾았다. 2층에 있었다. 단숨에 문을 열어젖히고 박력 있게 말했다.

 “진짜 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시원 총무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고액 연봉을 위해서라면 발가락이라도 핥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고시원을 옮겨 이사했다. 일은 쉬웠다. 오후 8시 30분 청소를 시작해 9시부터 자리를 잡는다. 방 보러 오는 학생들을 안내하고 월세를 받고 전화를 지키면서 새벽4시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그 시간 동안 대개 책을 보고 리포트를 쓰고 영화를 봤다. 나중에 잔뼈가 굵고 나선 3시가 되기 전에 그냥 잤다. 7시까지만 일어나 청소를 하면, 그걸로 야간 총무 업무의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그것 참 세상 되게 쉽고 편하다, 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쉽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 원장에게 내 근무 태도를 문제 삼은 모양이었다. 문을 잠그고 나가 보조 열쇠를 받으러 총무실에 내려갔더니 자리를 비우고 있더라, 는 내용이었다. 원장에게 한시간 가까운 정신교육을 받고 군기가 조금 들었다.

 그 뒤로는 원장이 총무실에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부쩍 늘었다. 아침저녁 청소 상태 검사에도 날이 섰다. 이놈의 인생이란 뭔가 할 만하면 피곤해지는구나. 누군가 밤새 건물 건물 대문 앞에 싸놓은 한 무더기의 똥을 치우며, 아니 이것은 흡사 말이 싼 똥이 아닌가 싶어 갸웃거리며, 나는 신세를 원망했다.

 자정을 한 시간 남긴 때였다. 총무실에 앉아 미노루 후루야의 만화를 보고 있었다. 한참 키득거리며 재미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다음에는 TV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천장이 쿵쿵, 진동까지 느껴지는 바람에 저 위층에서 실시간으로 무언가 거대한 일이 진행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 올라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 와중에도 소리는 점점 커졌다. 남녀의 교성이 뒤섞여 흡사 무슨 동물의 울음소리마냥 벽을 타고 내려왔다. 짐승들. 아주 끝장을 보는구나.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니,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가서 뭐라고 해야 되나. 하지마세요, 그래야 하나.

 별안간 총무실 앞 201호의 문이 열렸다...(중략) 좀체 말이 없는 201호 원생이 총무실 창문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나를 바라보고 섰다. 우리 눈이 마주쳤다. 원생이 오른손 집게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그리고 표정을 있는 힘껏 잔뜩 찌푸렸다. 이제껏 그가 그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곰팡이 포자를 발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얼른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306호였다. 내가 알기로는 어느 무역회사를 다니는 30대 초반의 여성이 기거하는 방이다. 302호에 사는 여대생이 문틈으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305호 문 앞까지 가 섰다. 아이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미 방 전체가 박살이라도 날 듯 진동하고 있었다.

 대개의 고시원이 그렇듯, 이 고시원의 방과 방 사이 벽이란 있으나마나 위장에 가까울 정도로 위태로운 것이었다. 합판보다 아주 조금 두꺼운 수준이라 해야 하나. 숨을 죽이고 일을 치러도 옆방에서 알아챌 텐데 이건 뭐 새해 첫 날 보신각 종 치듯 온 누리에 사랑을 알리고 있으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대단한 일이다. 인간의 교미가 이렇게까지 과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지금쯤 우주와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자기야 저기 코스모가 보여. 코스모! 코스모! 이 정도라면 과연 숭고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나는 인간 욕망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내심 숙연해진 채로 그냥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내게 코스모를 방해할 권한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똑똑. 아차 싶었다. 들었을까. 용케도 알아챘는지 소리와 진동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층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코스모는 사라졌다. 경외감도 사라졌다. 아니 이렇게 조용한 세상인데 말이야. 아, 저 총무인데요, 그,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른 분들이 불평을 하셔서요.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많이 좋니? 그렇게 좋아? 훌륭하십니다. 물어볼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고. 침묵이 이어졌다. 별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조금 기다리다 그냥 발길을 돌렸다. 어쨌든 조용해졌으니 곰팡이 형도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중략)


 그러다 순식간에 소름이 확 돋았다. 너무 놀라서 앉은 자리에서 혼절할 뻔했다. 내 생전 그렇게 무서운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싶다. 계단과 계단 사이 꺾이는 구간에 웬 사람이 머리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눈이 마주쳤지 싶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머리가 쏙 들어가 사라졌다. 그제야 상황을 알 만했다. 남자가 집에 가려는데 나랑 마주치기 미안했던지 무서웠던지 무안했던지 그런 모양이다. 아니 나는 당신을 존경한다고.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야.

 이윽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되게 참하게 생긴, 군인이었다. 아, 군인이었구나. 왠지 듬직하다는 기분. 우리의 국방력. 우리의 코스모.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인은 서두르고 있었다. 군화가 간신히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그것 참 대단히 미묘한 빠르기다. 도망가듯 도망가지 않는, 놀랍도록 애매한 속도였다. 곧 건물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보았더니 계단에 검은색 가죽 장갑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내게도 익숙한, 군에서 보급되는 가죽 장갑이다. 아이고 선생님 이걸 흘리고 가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집어서 따라 내려갔다. 대문을 나섰다. 저 왼쪽 방향으로 군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이유였는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장갑을 들어 가져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런데 웬걸, 군인이 뛰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너무나 빨랐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장갑 한 짝을 들고 거기 그냥 멍하니 섰다. 뭐랄까, 신화가 깨진 느낌이었다.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뛴 게 아니라 실은 계란도 풀어 먹었더라,는 고백을 들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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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1-09-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상의 방 한칸...짠한 청춘들이군요.

Arch 2011-09-17 09:44   좋아요 0 | URL
알케님 반가워요.

저는 그 방 한 칸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더랬어요.

머큐리 2011-09-1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참 인상깊은 대목이긴 했지요...^^

Arch 2011-09-17 09:44   좋아요 0 | URL
읽으셨구나. 작은 나라는 설렁설렁 잘 읽히는데 큰 나라 부분이랑 우석훈의 추천평을 영~

nada 2011-09-1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스모! 코스모! ㅋㅋㅋ
저도 이 부분이 젤 기억나요.

Arch 2011-09-17 09:45   좋아요 0 | URL
히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거에요. 그쵸?

마노아 2011-09-16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나 어제 주문했는데 주문하길 잘했어요.^^ㅎㅎㅎ

Arch 2011-09-17 09:45   좋아요 0 | URL
오호, 완전 맞아떨어졌는데요.
저기 페이지랑 써놨는데 제가 쓴줄 아셨나봐요.

poptrash 2011-09-16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 발췌라고 생각 못하고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ㅎㅎ
조... 좋은 추억이다

Arch 2011-09-17 12:03   좋아요 0 | URL
저는 DVD방 알바의 추..억이란게 있어요. 쿨럭

달사르 2011-09-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군침 꼴깍거리며 읽었는데, 댓글들 보면서 발췌인줄 알았네요.
이런 책들은 빨랑 읽어줘야 되는 책들이군요!

Arch 2011-09-17 09:46   좋아요 0 | URL
달샤르님 반가워요.
허지웅씨의 글맛이 좋아서 옮겨놓은거지, 이 얘기가 다는 아니에요. 물론 히메나 선생님 이야기가 있지만 정.말. 이게 다는 아니에요.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799§ion=sc8 

 일다의 기사를 옮겨와본다. 이매진피스의 강정마을에서 하루 보내기 계획도 좋고, 멘토링 인터뷰도 참 좋다. 이런 멘토가 있다면 어떨까.  

 그녀가 잘 쓰는 어투가 있는데 “그렇제? 우짜겠노.”이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는 방식 자체를 무디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야기 하다보면 “그렇지. 그래서였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온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공식보다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 상대에게도 그런 이유가 있었겠지”가 된다.
 
 최근 나의 골칫거리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확 엎어버려?" 랬더니, "힘들제. 우짜겠노"랬다. 여기서 우짜겠노는 '같이 생각해보자 + 어떤 방법이 있겠나 + 상대방은 염두에 두어봤나'의 줄임 말이다. 세 문장 중에 1문장이라도 마음이 와 닿으면 감정이 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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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8-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들제, 우짜겠노. 그렇제? 우짜겠노.
아, 새삼 너무 정감가고 마음 풀리게 하는 말이란 생각이 확 들어요.
마음의 여유도 느껴지고요.
여유공간이 있어야 상대도 받아들이죠.
세문장 중에 한 문장이라도,에서 특히 '상대방은 염두에 두어봤나' 이말도 이렇게 하면 비난이나 질책으로
안 들리고 마음을 누그러뜨려주는 말이 되겠네요.
당장 이 말을 써먹을거에요.^^

Arch 2011-08-30 10:17   좋아요 0 | URL
저는 위로에 젬병인데 그렇게 좀 무심해져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되니까 다행이다 싶어요. 그게 또 나랑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답을 찾는 방식 자체를 무디게 한다니. 이 부분도 참 좋았어요.
결혼생활은 열심히 안 하는게 비결이란 말도 참 좋았드랬구요.

프레이야님 오랜만이에요.
 

 강정마을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런 사정이 있는지 처음 듣습니다. 막연하게 자연은 보존해야지 정도였는데 여전히 구태를 반복하는 행정절차와 무엇보다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36765 

 절대보전지역 해제처분을 시행하기 위해 우근민 도지사가 해제처분을 직권취소하는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참여했음 좋겠어요.

http://cafe.daum.net/peacekj/ 

 제주도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경향신문 칼럼에서 나온 것처럼 관광도 참여라면 늦기 전에 강정마을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뭔가 답답하고 왜 세상이 이 모양이냐고 푸념만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나 챙겨서 하지도 못하고 불만만 말하니 제 진정성까지 의심되었습니다. 그냥 좀 그래보고 싶었던거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너무 조급하지 않게(지금 이 글은 좀 조급하지만) 천천히 가보려 합니다. 금방 달아올랐다가 할만큼 했다며 손 터는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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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6-2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어제 이 글 봤어야 했는데...오늘 보내서 낼까지 도착할지 걱정. ㅠ

Arch 2011-06-29 13:54   좋아요 0 | URL
우편으로 보내면 추적도 어렵고 제 날짜에 도착하기 힘들것 같아서 전 한꺼번에 모아서 등기로 보냈어요. 치니님, 고마워요.
 

   

 
  개혁. 진보파의 ‘민중 예찬’은 편의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나 ‘이건희 신드롬’을 정직하게, 아니 총체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무지몽매의 비극으로 보면서 그것마저도 수구 언론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가도 그 무지몽매한 대중이 선거판에서 뭘 좀 보여주면 헷가닥 ‘민중 예찬론’으로 돌아선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에 대한 상호 연관성은 규명되지 않는다.

 ‘민중 예찬론’에 경도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편의 입장을 보여온 희귀한 진보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리영희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리영희에 대한 개혁.진보 진영의 상투적인 평가와 예찬에 질려있다. 그의 과거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내 사상의 은사”라는 식의 회고담 일변도다. 나는 그런 찬사에서 오히려 ‘리영희의 종언’을 암시하는 오만을 읽는다. 

  지금 나의 논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지적 성실성’이다. 1. 26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리영희는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그마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적 제자들은 리영희를 군사독재정권의 도그마와 싸운 투사로만 기억하면서 그 기억을 박제해버렸으며, 그가 지금 정반대편의 도그마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외면하고 있지만 말이다. 

 2005년 3월 리영희는 회고록 <대화>출간을 계기로 오랜만에 많은 발언을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강경파의 이분법을 비판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전혀 그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의석이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한데 무리수를 쓸 수가 있나. 시간과 대세를 살펴가면서, 여유 있게 너그럽게 힘을 운영해야지. ... 이제는 군부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리영희는 <대화>에서 ‘민족적 유전자론’까지 제기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지배한 분열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면서 사화. 당쟁. 분당. 족벌. 정치 등과 같은 퇴행적 형태의 요소가 ‘민족적 유전자’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을 때가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민족적 유전자’라는 과격하나 용어까지 써가면서 리영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민족적 면책론’에 대한 거부다.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는 의지나 흉계에다가 일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리영희는 대담자 임헌영에게 “이제 21세기로 넘어왔으니 우리 민족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우리 역사가 겪은 실패들을 외세에만 돌리지 말고, 뼈아픈 자기비판을 통해서, 노신이나 프란츠 파농이 그들 동포에게 요구했던 그런 민족적 각성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래. 이러한 정신 자세야말로 진정한 겨레 사랑이고 민족적 긍지가 아닐까 싶은데. 어때요, 안 그래요?”라고 동의를 구했다.

 임헌영, 그동안 나라를 지킨건 민중인데 민족적 허무주의로 흘러버리면 너무 서글프다고 하자,
리영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민족허무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가는구만”이라고 답하면서 “나라를 판 것은 지도층이나 지배계층이고 나라를 염려하고 지킨 것은 대중이라는 관점도 조금 문제야.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이분법적으로 단정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리영희의 이런 주장들이 다 옳다는 게 아니다. 내가 놀랍게 생각한건 리영희의 <대화>출간과 함께 양산된 많은 기사들이 위와 같은 주장은 전혀 거론하지 않으면서 오직 ‘원로에 대한 찬양’에 몰두하는 걸로만 끝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그건 분명히 마스터베이션이었다. ‘지적 불성실’의 극치였다. 국가보안법과 관련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끌어내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강행할 경우 정치적 치명상도 문제였다. 그런데 <한겨레>는 단 한 번도 그 점을 다루지 않은채 국가보안법의 폐지의 당위성만 역설했다.

 나는 한겨레가 그런 적극 대응을 포기하고 ‘지당하신 원론’만 역설했던 게 개혁. 진보 진영의 ‘아비투스(습속)’로 자리잡은 마스터베이션 기질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 기질은 원론과 상식에만 투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론과 상식은 반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승리한다. 그러나 그건 실속 없는 승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원론과 상식으로 대처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상식을 무기 삼아 싸우는 건 필요한 일이거니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매사에 상식을 전방위적 무기로 사용하면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리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도 상식만으론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이 있는 법인데, 그것마저도 해오던 습관대로 상식의 칼로 단순 명쾌하게 재단하려 한다면 그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한겨레21, 인물과 사상에 실렸던 내용을 펴낸 강준만의 책이다. 바캉스나 사랑타령인 대중가요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대중의 고독에서는 이젠 정말 책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구나 싶었는데 정치로 넘어가면서 '역시나' 싶었다. 제목만 잘 뽑아내고 내용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가 싶었는데 민주당에서 열린 우리당 탈당 과정에서의 강준만의 생각과 입장을 들을 수 있어서 그리 나쁘진 않았다. 여전히 이 부분이 명확하게 정리되진 않지만 열린우리당 분당으로 지역 기반 정당이 바뀌진 않았다. 연고에 기반을 둔 모임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정당 참여는 저조할 수 밖에 없었고 강준만이 우려한대로 열린우리당 분당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독한 한국인>에 정치적인 내용만 나오는건 아니다. 강준만이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지방의 고독, 바캉스의 이면-일상탈출이면서 평등을 지향하는 몸부림-, 사회 곳곳에 있는 낙하산 인사의 허점까지 두루 다 다루니 말이다. 늘 그랬듯이 강준만의 책은 종합선물세트다.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가 쓰고 싶은 글을 다 쓰는데 내용의 모든 면은 다 충족되니까. 이 책을 읽고 리영희에 대해서 안 것도 큰 수확이다. 돌아가신 후 신문에서 한창 떠들어댈때는 몰랐는데 그분 생각의 단편만 엿보았는데도 어떤 분인지 단박에 알 것 같다. 

  <한겨레> 읽기를 좋아하고 정혜신과 몇몇 칼럼리스트의 글을 좋아했다. 하지만 강준만의 지적대로 지적으로 성실하고 치열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모두가 상식적으로 동의하는 것만 핏대 높여 주장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새로운 견해나 각론이 아니라 상식만 외쳐대는건 그 자체로 도덕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든다. 착하긴 한데 매력없는 아이랄까. 그럼 한겨레는 어떻게 해야할까.  

 개혁. 진보파는 자신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 '대한민국 경영'을 꿈꾸며 여론을 이끌어가기 위해 애쓰는 싱크탱크들이 크게 늘었다. ... 지금 수백만 인구가 재벌 경제연구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안달하는 형국이다. 이건 두렵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모든 '실질'은 넘겨주고 '명분'으로 마스터베이션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한겨레>는 자신을 저항자로 낮추는 과도한 겸손에서 벗어나 주도자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요리해보겠다는 건방을 떨어볼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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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2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유일하게 믿는 지식인은 강준만 선생입니다. ^^ 저도 강준만 선생님 덕분에 리영희 교수님을 알게 됐죠. 예전 <인물과 사상>에서 열린우리당 창당은 결국 다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며 예언(?)을 했었죠. 그 덕분에 욕도 되게 많이 먹으셨는데 지금와서 보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맞춰다는 점이죠.

착하긴 한데 매력없는 지식인들 보다는 강준만 선생님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지식인의 글을 보는 것이 저에게는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강준만, 박홍규 이렇게 두 교수님의 저작은 빠짐없이 구입해서 읽으며 조금 더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애써요. ㅋ

Arch 2011-05-24 11:47   좋아요 0 | URL
강준만 선생님이 열린우리당이 실패로 돌아갈거란 예언을 했는지 몰랐어요. 다만 민주당의 구태를 바꾸는게 유시민이 주장하는것처럼 다른 당의 창당으로 가능하진 않을거라는, 결국 영남바라기일 뿐이라는 점 정도만 기억해요.

몇달 전쯤 강준만 선생님이 한겨레에서 인터뷰를 하셨더라구요. 실명 비판을 하면서 사람들이 비난할 때는 감수할 수 있었는데 열린우리당 창당시 자신이 반대해서 여러 사람이 등을 돌렸고 그게 너무 상처였다고. '고독한 한국인'은 얼마간은 뜨겁던 그때에 쓴 글을 모은거예요. (인터뷰를 잘못 인용한거 같아 원본 기사를 붙이려고 했는데 한겨레 창이 안 열려요)

루쉰P 2011-05-25 23:04   좋아요 0 | URL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근데 Arch님의 글을 보니 그렇게 발언하신 것이 맞다고 생각되네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요.

열린우리당 창당과 관련해 강준만 선생님이 한동안 정치에 대한 글을 놓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상처가 깊으셨던 것 같더라구요. 강준만 선생님의 책만 열심히 읽어도 한국인의 유전자 구조를 해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Arch 2011-05-26 10:26   좋아요 0 | URL
유전자 코드? ^^ 너무 난해해요. 회사에 다니다보니 관행적인 것들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그'의 시각이 요새 더 좋아지고 있어요. 그런면에서 박노자씨의 글도 좋아요.
 

 

<그를 인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들을 비롯한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이며 수치이다. 따라서 그동안 연쇄살인범들의 인권을 내세우며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에 몹시 반감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강호순의 얼굴이 공개된 것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된 권리를 나타내는 말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길 포기한 그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주는 것은 권리의 남용이다. 물론, 살인범 가족들의 권리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피해자와 유가족 혹은 국민의 알 권리는 무엇이 보장해줄 것인가? - 진영의 글>

 우리가 어떻게 도덕의 덫에 빠져 우리 스스로를 윤리화할 기회를 빼앗기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잔혹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 문제이다. 인간이 분리되고 서열화되는 순간 ‘인간’이란 범주는 깨진다. 가장 아래에 있는 범죄자 등의 인간을 모든 인권을 박탈당하고 짐승이 되어 전시된다. <난민, 이주 노동자처럼> 도덕이 반윤리를 승인하며 바로 이것이 현실 정치의 역할이다.

 나는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하여 그 언어가 도달하는 곳까지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학생들의 사유 방식이 반인권적이라고 비판하고 인권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드러내주고 그런 사유방식의 종착지를 같이 유추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들의 입에서도 이미 나온 말이기에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것이며,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 세계 속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도 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개념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언어로는 어떻게 축약되고 표현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부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소통하고 경쟁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에 차 있을 때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는 셈이라는 말에는 학생들도 동의한다.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인지상정이 있는 ‘인간’으로 되어가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를 띠고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공감능력은 완전체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확장되는 힘, 능력이라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모두를 환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디서 활성화되고 어디서 멈추는가? 우리는 우리의 공감 능력이라는 힘을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혹 우리의 공감 능력은 주어진 곳에서만 자동적으로 작동하고 멈추는 수동적인 것이지는 않은가? 강의실에서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대단히 쉽게 우리의 공감능력이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족과 국가, 인종과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인간’의 공감 능력은 분할되어 있다. 누구는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공감도 가지지 못하고, 누구는 이주 노동자에 대해서 그들의 인권도 소중하지만 한국 국민부터 먼저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됨의 핵심이라고 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떤 분류표에서 멈추었다. 한 학생이 이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가진 무게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수업이라고 믿는다. 이런 수업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서 겉도는 말의 수음에서 벗어나 내 삶을 돌아보고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언어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남의 언어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언어로 말하는 힘, 그리고 그에 대해 팽팽하게 긴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개념이 그저 공허한 말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의 삶을 설명하는 살아 있는 언어임을 배울 수 있었다. 현장과 언어, 이론은 삶을 풍부하게 설명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언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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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3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해서, 이 봄에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애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그나저나 양파들이 참 다양하네요 ^^

Arch 2011-04-01 09:52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이런 저런 자극을 주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나고보니 알겠더라구요. 엄기호씨가 의도한건 아니겠지만 그의 방식은 그에게 배움을 줬던 조혜정 선생님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공부하는 공간이 많아지고, 그런 교실이 여러군데 있어서 관심있는 분야가 있으면 껴서 얘기하고 그랬음 참 좋겠다.

전 민의 그림이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 2011-04-0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대문 사진이 바뀌었네요.
전 육심원의 그림도 좋았었는데...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Arch 2011-04-01 09:55   좋아요 0 | URL
파랑 그림 말하는거죠. 그게 육심원의 그림이었어요? 동네 벽화를 사진으로 찍은거였는데. 벽화가 육심원의 그림을 따라 그린건가?

올 보이스 두잇! 빼놓고 저는 이분 책 다 읽었어요. 자랑은 아니고~ ^^

양철나무꾼 2011-04-02 02:29   좋아요 0 | URL
아~ 파랑책은 어느 일본 만화 주인공인줄 알았었고,
그전 새침떼기 아가씨요~^^

Arch 2011-04-02 09:08   좋아요 0 | URL
그전게 생각 안 나요. ㅡ,.ㅜ;;

알로하 2011-04-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흥미롭게 봤어요. 후배들에게 꼭 한번 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

Arch 2011-04-06 09:00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오랜만이에요~ 그러니까요! 저도 참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