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진보파의 ‘민중 예찬’은 편의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나 ‘이건희 신드롬’을 정직하게, 아니 총체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무지몽매의 비극으로 보면서 그것마저도 수구 언론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가도 그 무지몽매한 대중이 선거판에서 뭘 좀 보여주면 헷가닥 ‘민중 예찬론’으로 돌아선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에 대한 상호 연관성은 규명되지 않는다.

 ‘민중 예찬론’에 경도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편의 입장을 보여온 희귀한 진보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리영희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리영희에 대한 개혁.진보 진영의 상투적인 평가와 예찬에 질려있다. 그의 과거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내 사상의 은사”라는 식의 회고담 일변도다. 나는 그런 찬사에서 오히려 ‘리영희의 종언’을 암시하는 오만을 읽는다. 

  지금 나의 논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지적 성실성’이다. 1. 26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리영희는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그마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적 제자들은 리영희를 군사독재정권의 도그마와 싸운 투사로만 기억하면서 그 기억을 박제해버렸으며, 그가 지금 정반대편의 도그마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외면하고 있지만 말이다. 

 2005년 3월 리영희는 회고록 <대화>출간을 계기로 오랜만에 많은 발언을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강경파의 이분법을 비판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전혀 그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의석이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한데 무리수를 쓸 수가 있나. 시간과 대세를 살펴가면서, 여유 있게 너그럽게 힘을 운영해야지. ... 이제는 군부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리영희는 <대화>에서 ‘민족적 유전자론’까지 제기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지배한 분열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면서 사화. 당쟁. 분당. 족벌. 정치 등과 같은 퇴행적 형태의 요소가 ‘민족적 유전자’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을 때가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민족적 유전자’라는 과격하나 용어까지 써가면서 리영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민족적 면책론’에 대한 거부다.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는 의지나 흉계에다가 일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리영희는 대담자 임헌영에게 “이제 21세기로 넘어왔으니 우리 민족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우리 역사가 겪은 실패들을 외세에만 돌리지 말고, 뼈아픈 자기비판을 통해서, 노신이나 프란츠 파농이 그들 동포에게 요구했던 그런 민족적 각성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래. 이러한 정신 자세야말로 진정한 겨레 사랑이고 민족적 긍지가 아닐까 싶은데. 어때요, 안 그래요?”라고 동의를 구했다.

 임헌영, 그동안 나라를 지킨건 민중인데 민족적 허무주의로 흘러버리면 너무 서글프다고 하자,
리영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민족허무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가는구만”이라고 답하면서 “나라를 판 것은 지도층이나 지배계층이고 나라를 염려하고 지킨 것은 대중이라는 관점도 조금 문제야.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이분법적으로 단정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리영희의 이런 주장들이 다 옳다는 게 아니다. 내가 놀랍게 생각한건 리영희의 <대화>출간과 함께 양산된 많은 기사들이 위와 같은 주장은 전혀 거론하지 않으면서 오직 ‘원로에 대한 찬양’에 몰두하는 걸로만 끝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그건 분명히 마스터베이션이었다. ‘지적 불성실’의 극치였다. 국가보안법과 관련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끌어내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강행할 경우 정치적 치명상도 문제였다. 그런데 <한겨레>는 단 한 번도 그 점을 다루지 않은채 국가보안법의 폐지의 당위성만 역설했다.

 나는 한겨레가 그런 적극 대응을 포기하고 ‘지당하신 원론’만 역설했던 게 개혁. 진보 진영의 ‘아비투스(습속)’로 자리잡은 마스터베이션 기질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 기질은 원론과 상식에만 투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론과 상식은 반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승리한다. 그러나 그건 실속 없는 승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원론과 상식으로 대처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상식을 무기 삼아 싸우는 건 필요한 일이거니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매사에 상식을 전방위적 무기로 사용하면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리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도 상식만으론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이 있는 법인데, 그것마저도 해오던 습관대로 상식의 칼로 단순 명쾌하게 재단하려 한다면 그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한겨레21, 인물과 사상에 실렸던 내용을 펴낸 강준만의 책이다. 바캉스나 사랑타령인 대중가요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대중의 고독에서는 이젠 정말 책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구나 싶었는데 정치로 넘어가면서 '역시나' 싶었다. 제목만 잘 뽑아내고 내용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가 싶었는데 민주당에서 열린 우리당 탈당 과정에서의 강준만의 생각과 입장을 들을 수 있어서 그리 나쁘진 않았다. 여전히 이 부분이 명확하게 정리되진 않지만 열린우리당 분당으로 지역 기반 정당이 바뀌진 않았다. 연고에 기반을 둔 모임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정당 참여는 저조할 수 밖에 없었고 강준만이 우려한대로 열린우리당 분당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독한 한국인>에 정치적인 내용만 나오는건 아니다. 강준만이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지방의 고독, 바캉스의 이면-일상탈출이면서 평등을 지향하는 몸부림-, 사회 곳곳에 있는 낙하산 인사의 허점까지 두루 다 다루니 말이다. 늘 그랬듯이 강준만의 책은 종합선물세트다.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가 쓰고 싶은 글을 다 쓰는데 내용의 모든 면은 다 충족되니까. 이 책을 읽고 리영희에 대해서 안 것도 큰 수확이다. 돌아가신 후 신문에서 한창 떠들어댈때는 몰랐는데 그분 생각의 단편만 엿보았는데도 어떤 분인지 단박에 알 것 같다. 

  <한겨레> 읽기를 좋아하고 정혜신과 몇몇 칼럼리스트의 글을 좋아했다. 하지만 강준만의 지적대로 지적으로 성실하고 치열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모두가 상식적으로 동의하는 것만 핏대 높여 주장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새로운 견해나 각론이 아니라 상식만 외쳐대는건 그 자체로 도덕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든다. 착하긴 한데 매력없는 아이랄까. 그럼 한겨레는 어떻게 해야할까.  

 개혁. 진보파는 자신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 '대한민국 경영'을 꿈꾸며 여론을 이끌어가기 위해 애쓰는 싱크탱크들이 크게 늘었다. ... 지금 수백만 인구가 재벌 경제연구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안달하는 형국이다. 이건 두렵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모든 '실질'은 넘겨주고 '명분'으로 마스터베이션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한겨레>는 자신을 저항자로 낮추는 과도한 겸손에서 벗어나 주도자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요리해보겠다는 건방을 떨어볼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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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2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유일하게 믿는 지식인은 강준만 선생입니다. ^^ 저도 강준만 선생님 덕분에 리영희 교수님을 알게 됐죠. 예전 <인물과 사상>에서 열린우리당 창당은 결국 다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며 예언(?)을 했었죠. 그 덕분에 욕도 되게 많이 먹으셨는데 지금와서 보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맞춰다는 점이죠.

착하긴 한데 매력없는 지식인들 보다는 강준만 선생님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지식인의 글을 보는 것이 저에게는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강준만, 박홍규 이렇게 두 교수님의 저작은 빠짐없이 구입해서 읽으며 조금 더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애써요. ㅋ

Arch 2011-05-24 11:47   좋아요 0 | URL
강준만 선생님이 열린우리당이 실패로 돌아갈거란 예언을 했는지 몰랐어요. 다만 민주당의 구태를 바꾸는게 유시민이 주장하는것처럼 다른 당의 창당으로 가능하진 않을거라는, 결국 영남바라기일 뿐이라는 점 정도만 기억해요.

몇달 전쯤 강준만 선생님이 한겨레에서 인터뷰를 하셨더라구요. 실명 비판을 하면서 사람들이 비난할 때는 감수할 수 있었는데 열린우리당 창당시 자신이 반대해서 여러 사람이 등을 돌렸고 그게 너무 상처였다고. '고독한 한국인'은 얼마간은 뜨겁던 그때에 쓴 글을 모은거예요. (인터뷰를 잘못 인용한거 같아 원본 기사를 붙이려고 했는데 한겨레 창이 안 열려요)

루쉰P 2011-05-25 23:04   좋아요 0 | URL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근데 Arch님의 글을 보니 그렇게 발언하신 것이 맞다고 생각되네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요.

열린우리당 창당과 관련해 강준만 선생님이 한동안 정치에 대한 글을 놓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상처가 깊으셨던 것 같더라구요. 강준만 선생님의 책만 열심히 읽어도 한국인의 유전자 구조를 해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Arch 2011-05-26 10:26   좋아요 0 | URL
유전자 코드? ^^ 너무 난해해요. 회사에 다니다보니 관행적인 것들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그'의 시각이 요새 더 좋아지고 있어요. 그런면에서 박노자씨의 글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