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인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들을 비롯한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이며 수치이다. 따라서 그동안 연쇄살인범들의 인권을 내세우며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에 몹시 반감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강호순의 얼굴이 공개된 것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된 권리를 나타내는 말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길 포기한 그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주는 것은 권리의 남용이다. 물론, 살인범 가족들의 권리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피해자와 유가족 혹은 국민의 알 권리는 무엇이 보장해줄 것인가? - 진영의 글>

 우리가 어떻게 도덕의 덫에 빠져 우리 스스로를 윤리화할 기회를 빼앗기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잔혹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 문제이다. 인간이 분리되고 서열화되는 순간 ‘인간’이란 범주는 깨진다. 가장 아래에 있는 범죄자 등의 인간을 모든 인권을 박탈당하고 짐승이 되어 전시된다. <난민, 이주 노동자처럼> 도덕이 반윤리를 승인하며 바로 이것이 현실 정치의 역할이다.

 나는 교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하여 그 언어가 도달하는 곳까지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학생들의 사유 방식이 반인권적이라고 비판하고 인권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드러내주고 그런 사유방식의 종착지를 같이 유추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들의 입에서도 이미 나온 말이기에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것이며,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 세계 속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도 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개념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언어로는 어떻게 축약되고 표현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부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소통하고 경쟁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에 차 있을 때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는 셈이라는 말에는 학생들도 동의한다.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인지상정이 있는 ‘인간’으로 되어가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를 띠고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공감능력은 완전체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확장되는 힘, 능력이라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모두를 환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디서 활성화되고 어디서 멈추는가? 우리는 우리의 공감 능력이라는 힘을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혹 우리의 공감 능력은 주어진 곳에서만 자동적으로 작동하고 멈추는 수동적인 것이지는 않은가? 강의실에서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대단히 쉽게 우리의 공감능력이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족과 국가, 인종과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인간’의 공감 능력은 분할되어 있다. 누구는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공감도 가지지 못하고, 누구는 이주 노동자에 대해서 그들의 인권도 소중하지만 한국 국민부터 먼저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됨의 핵심이라고 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떤 분류표에서 멈추었다. 한 학생이 이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가진 무게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수업이라고 믿는다. 이런 수업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서 겉도는 말의 수음에서 벗어나 내 삶을 돌아보고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언어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남의 언어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언어로 말하는 힘, 그리고 그에 대해 팽팽하게 긴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개념이 그저 공허한 말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의 삶을 설명하는 살아 있는 언어임을 배울 수 있었다. 현장과 언어, 이론은 삶을 풍부하게 설명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03-3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해서, 이 봄에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애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그나저나 양파들이 참 다양하네요 ^^

Arch 2011-04-01 09:52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이런 저런 자극을 주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나고보니 알겠더라구요. 엄기호씨가 의도한건 아니겠지만 그의 방식은 그에게 배움을 줬던 조혜정 선생님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공부하는 공간이 많아지고, 그런 교실이 여러군데 있어서 관심있는 분야가 있으면 껴서 얘기하고 그랬음 참 좋겠다.

전 민의 그림이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 2011-04-0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대문 사진이 바뀌었네요.
전 육심원의 그림도 좋았었는데...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Arch 2011-04-01 09:55   좋아요 0 | URL
파랑 그림 말하는거죠. 그게 육심원의 그림이었어요? 동네 벽화를 사진으로 찍은거였는데. 벽화가 육심원의 그림을 따라 그린건가?

올 보이스 두잇! 빼놓고 저는 이분 책 다 읽었어요. 자랑은 아니고~ ^^

양철나무꾼 2011-04-02 02:29   좋아요 0 | URL
아~ 파랑책은 어느 일본 만화 주인공인줄 알았었고,
그전 새침떼기 아가씨요~^^

Arch 2011-04-02 09:08   좋아요 0 | URL
그전게 생각 안 나요. ㅡ,.ㅜ;;

알로하 2011-04-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흥미롭게 봤어요. 후배들에게 꼭 한번 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

Arch 2011-04-06 09:00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오랜만이에요~ 그러니까요! 저도 참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