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자신감과는 또 다르다. 자신감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면, 그건 우울했던 20대 초반의 몇 년간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없을 거란 생각부터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존감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난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날 입증해 보이려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했던 것들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바동거렸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승인을 다른 이들로부터 따내려 했다.
 하지만 그날 날, 내가 가진 자산과 능력과 상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거기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가진 것들이 백 점짜리여서가 아니다. 부족해도 그게 있는 그대로의 나이기에. 내가 나 아닌 누군가가 될 수는 없기에.
 자존감이란 그런 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거. 그 지점에 도달한 후엔 더 이상 타인에게 날 입증하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누구의 승인도 기다리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재밌어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다른 사람 역시 어떤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약 내가 서울대를 갔더라면 분명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 겨우 공부 하나 잘하는 걸 가지고 스스로 존재 자체가 우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시절의 편협하고 유치한 멘탈리티, 그걸 결코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을 게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삶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위해 내 인생 대부분을 소비하고 살았을 게다. 그렇게 누구의 기대도 저버리지 못했을 게다.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건 내 존재의 우월함을 스스로 저버리는 거라 여겼을 테니까.
  난 이제 자신이 온전히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된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안다. 그래서 이제 누구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 없이는, 평생을, 남의 기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쓰고 만다.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에 그만한 낭비도 없다.

 내 평면으로부터 벗어나면 다음 중요한 건, '물끄러미' 파트. 바라보되, 물끄러미, 바라보기. 이건 뭐냐. 이건 시큰둥하란 건데 시니컬하곤 다르다. 길 가는데 쾅, 차사고 났다. 돌아봐라. 사람 다쳤으면,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거지 뭐, 무덤덤 씨불인다. 이건 시니컬. 반면, 쾅 했다. 안 돌아본다. 다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러고 그냥 간다. 이건 시큰둥.
 이제 그 차사고가 내 인생의 도로에서 났다 생각해보라. 느낌 오나? 삶의 통증 대부분은 자기만 힘든 줄 알아서 자기가 만드는 거다. 억울해서. 더구나 자기가 너무 중요한 줄 안다. 그래서 북받친다. 하지만 이, 시큰둥, 되잖아. 그럼 자기 인생 가지고 소설 안 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있는 그대로 보인다. 담백해진다고. 당연히 관점도 클리어해진다. 자, 여기까지가 자기객관화 패키지.
 자기객관화란 입체의 연속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스스로 인지하는 거다. 그리고 그렇기에 거기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다. 세계 속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일정 거리 이상 확보되어야 제 모습 전체가 조감되는 법이니까.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당신은 그 관계로써 이젠 정숙한 아내, 윤리적 엄마가 아니다, 란 사실 감당하기 싫다. 그로 인한 죄의식, 불안 비용도 싫다. 반대 선택도 마찬가지다. 설레는 가슴, 정서적 충만, 격정적 사랑 잃고 건조한 결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둘 다 갖고 싶다. 선택하기 싫은 거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우주 원리다. 뉴턴은 이건 작용-반작용이라 했다. 근데 이 말 가만 뒤집어보면, 비용 지불한 건, 온전히, 자기 거란 소리다. 이 대목이 포인트다. 공짜가 아니었잖아.

(키 작단 고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릴 만큼 견고하고 대범한 자기인식은, 그 자체로, 졸라 섹시하다. 그러니까 당신을 진정 안 섹시하게 만드는 범인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스스로 주눅 드는, 당신의 자기인식일 게다. 

(꿈과 현실) 먼저 꿈이란 말 대신 목표라고 하자. 꿈이란 단어 자체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의 어려운 현실은 꿈을 이루는 과정의 당연한 난관이니 적당히 무시하는 게 마땅한 태도라며, 스스로를 '나이브'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게 만드는 이 자기최면이 긍정적 위력을 발휘할 때,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효과가 긍정적이려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꿈이라는 말이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에 자체 발부하는 면죄부, 스스로에게 분사하는 최면가스가 아니려면 말이다. 그러니 일단 꿈이란 단어를 목표로 바꾸고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
 첫째, 경제적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그 기회를 포기해온 것인가. 이 질문,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묻는거,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을 '꿈'이란 단어로 포장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 단어 자체가 그만큼 낭만적이다. 용서받기 수월해서 대충 기대고 비비기에 좋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그렇게 한다.
 둘째, 목표와 현실이 얼마나 같이 놀고 있는가. 목표는 현실적일 때만 성취된다. 그러자면 일정이 매우 구체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냥 그 업계에 있다고 시간이 알아서 당신을 그 목표 지점에 실어 나르는 게 아니다. 당신의 목표는 얼마나 구체적인가. 그리고 그걸 이루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꼼꼼하게 계산해봤나.
 셋째, 당신이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은 어디까진가.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럼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삶에 대한 응석에 불과하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가 아니라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수입 적으면 적게 쓰라. 없으면 자신이 번 만큼만 쓰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냉정하게 답한 후 '꿈'을 말해도 말하시라. 그런 질문 생략하고 그저 꿈만 말한다면, 그 단어 뒤에 숨어 부모한테 얹혀사는 팔자 좋은 놈팽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꿈은 목표이지 핑계일 수 없다.

 '고마치 해묵었으모 됐다... 부끄러운 기라... 이제 마 대중이가 해라 케라'
 정작 자신들은 한 번도 누려본 적도 없는 허구의 기득권을 부여잡고 지역에 기생하는 정치배들이 제공한 핑계와 거짓을 주워섬기며 앙상한 선민의식으로 버티던 한 무리의 경상도 서민들 입을 다물게 한건, 그렇게 논리가 아니라 70대 노인네의 염치였다. 아, 가슴이 아팠다. 그 한마디에 담긴 경상도의 자조가, 정치꾼들이 그들 가슴에 심어놓은,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원죄의식이. 자리는 거기서 끝이 났고 그래도 그들 중 DJ에게 표를 준 이는 아무도 없었을게다. 모친이 난생 처음 기권한 게 그나마 그 말이 그해 대선에 끼친 직접적 영향의 전부였다.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착각하는 넘들이 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 윤리. 자본주의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대면할 때,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라.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전통적 의미에서 우리네 고부 갈등의 본질은 가부장 가족 체제 아래서 육아에서 봉양까지 담당하며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가부장이 취하고 남긴 자투리 권한을 놓고 벌였던 권력 투쟁. 그리고 그 쟁투에서 승리한 유사가부장-시어머니의 후광 업고 섭정 권력을 후천적으로 학습한 이가 시누이고, 시누이의 가학성은 개인 품성이 아니라 그렇게 권력 구조의 소산이라고. 그 구조가 유효한 한 그 가학성은 사회적으로 유전되어 왔고, 시누이는 그래도 되는 법이란 진단 유전자가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거지.  

(상사가 능력없다는 고민) 능력이란 게 업무를 재빨리 파악하고 문서를 예쁘게 꾸미고 보고서 잘 만들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절대 아니다. 당신 회사의 사장이나 이사가 그런 능력이 출중해서 그 자리에 간 게 아니라고. 사람들의 욕망과 갈등을 중재하는 정치력, 일의 큰 방향성을 가늠하는 통찰력, 인간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부리는 용인술, 상대로부터 신뢰를 얻어내는 태도, 자세, 외모, 말투를 비롯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 분명히 있었기에 그 자리에 간 거다.

  난 이런 관계를 제목 없는 관계라고 부른다. 왜냐. 정말 제목이 없거든. 연인이냐 하면 정확히 맞는 정의가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친구냐 하면 그 역시 딱 떨어지지 않거든. 그럼 제목이 없으니 그런 관계는 아무 관계도 아닌 거냐. 아니지. 그냥 제목이 없을 뿐이다. 들판의 꽃이,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아니더냐.
 그럼 왜 그런 관계가 생기느냐.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기 때문이다. 0과 1의 이진수로 이뤄진 디지털의 세계에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0과 1사이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디지털에선 연인이거나 혹은 아니거나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불연속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 0과 1사이에도, 관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혼란스러운 데다 무섭기까지 하다. 왜냐.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상대의 사랑이기도 한 존재를 상상해보시라. 인정하기 싫다. 날 떠날까 무섭기도 하고. 해서 사람들은 0과 1의 똑 부러지는 관계에 대한 제목만 만들어냈다. 중간 어딘가는 불확실해서 무서우니까. 괴로우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배타적 언어, '연인'은 이번엔 거꾸로 사고 자체를 그렇게 속박한다. 애초부터 0과 1 이외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그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가 부재한다고 그 관계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느냐. 결코 아니거든. 0.64짜리 애인, 있을 수 있다. 섹스도 하고 서로를 걱정도 해주지만 각자 애인은 따로 있는 관계 혹은 섹스는 전혀 하지 않지만 애인 제쳐두고 모든 영화를 같이 보는 관계,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럼 친구인가 애인인가. 존재하는 명칭만으로 설명이 충분히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신과 그 사이엔 지금 그런 제목 없는 관계가, 싹트고 있는거다. 그리고 그 관계를 적당히 칭할 제목이 없어 당황하고 있는 거고. 제목이 없으니 그나마 가장 가까운 우정이란 단어 속에 그 관계를 우겨넣고 있는 거고.
 자, 어떻게 해야 하냐. 내 조언은 그렇다. 그 관계가 그 관계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제 스스로 발전해가는 데까지 기꺼이 따라가보라고. 그게 쉬운 길이라 따라가보라는 건 아니다. 제목이 없다는 건, 당신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합당하게 설명할 방도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소리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제목에 맞는 관계로 서로를 우겨 넣으라고 하는 사회적 압력도 작용할 게다. 그런 긴장과 갈등과 알력으로 인해 결국 그 관계가 흐지부지되고 마는 게 다반사이기도 하고. 그러니 쉬운 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대가를 지불하고도, 그런 관계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지속된다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의, 듣도 보도 못한 궤도를, 당신들 둘이서 돌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게다. 그리고 그로인한 즐거움은, 온전하 1짜리 연인관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 생겨지더냐.

 만약 당신이 허전하고 미안해서,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다면, 불행해질 확률 매우 크다. 그건 '제리맥과이어'식으로 말하자면 "being polite"하려는 거니까. 상대를 이렇게 아프게 하면서까지 그의 감정을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 정도의 예의 바른 마음으로 시혜적 연애를 시작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거, 여자는 재깍 알아본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을 구걸했단 의식을 항상 갖게 된다고. 관계 균형의 추가 결코 평형에 오질 못한다고. 불행하지.

 당신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할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선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지금 당신의 진짜 문제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게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기 싫어 아예 선택 자체를 피해버린다. 그렇게 선택으로부터 도망가면 결국 다른 사람이나 시간이 당신을 대신해 선택을 한다. 결과라는 건 그렇게 당신이 선택을 하든 않든,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닥치기 마련이다. 그 경우 당신은 당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거다. 그러니 어느 쪽이 됐건 반드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시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고백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고백을 하지 않는 것도, 망설이다 그냥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당신이 그 고백을 유보하기로 결심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후회될 땐 잘못된 선택을 되돌아볼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었다는 걸 알았을 때다.

 연인관계를 자발적 구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우 방점은 자발적이란 데 찍혀야 하는 거거든. 방점이 구속으로 이동하게 되면, 그래서 안달하며 구속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게 바로 관계의 생리거든. 몸 묶는다고 마음 묶이나.
 그러니 그냥 냅두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좋아하기나해줘. 이 여자가 이러다 날 떠날지 모르니 그럼 여태 내가 준 건 다 헛수고가 될 텐데, 이러다 낙동강 오리알 되면 남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까, 내가 뭐가 못하다고 따위의 본전 의식, 자존심, 공포심은 떨쳐버리셔. 그런 생각에 신경 뺏기지 말고 오로지 당신과 그녀가 지금 당장 주고받을 수 있는 연애의 즐거움에 최대한 집중하라고. 그렇지 않고 약게 하는 연애는 얕아서 완전연소가 안 돼요.
 완전연소. 서로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남김없이 주고받아 더 이상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정서적 충만감에 다다른 연애를 말하는 건데, 그런 걸 경험하고 나면 상대가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붙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기원해줄 수 있게 돼.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태워버린 거니까. 그런 거 흔히 겪는 일도 아니고 누구하고나 겪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연애의 절정이란 그런 거야. 시시한 연애 열 번보다 그런 연애 한 번이 백만 배 낫다. 그러니 당신이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그래도 그녀가 떠난다? 그럼 인연이 거기까진 거야.

 내짝 독점+남짝 찬탈 욕망이 제짝 피탈 공포와 합의 본 절충안, '한 번에 한 넘만'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의 주류 규범일 순 있어도 절대 선은 아니다. 안전과 안정 대신 불안과 이별 위험 감수하며 맥시멈 쾌락에 베팅하는 선택 자체는, 곰곰이 따지고 보면, 세계관의 영역이다. 다만 연애라는 도전이 응하는 제 방식이 그러하다면 상대에게 충분히 미리 고지하고 합의를 봤어야 했고, 저간의 사정으로 고지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사후 발각되는 결계는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사전 고지 생략은 비겁하고, 사후 발각은 무능하다 하겠다. 

신정환은 공인인가. 답, 아니오. 연예인, 그들은 공공의 영역에서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공복이 아니라 공공연한 영역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직업인이다. 국민투표로 그들 선발해 성금 각출로 그들 무명 시절 자금 조당해주고 반상회에서 순번 정해 그들 출연하는 프로 의무 방청한 게 아니다. 그들의 영업 내용이 퍼블릭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업 장소가 마침 퍼블릭할 뿐인게다. 하여 그들에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평균 이상의 공적 가치를 지향할 의무, 없다. 각종 연예인 사건 때마다 공인 운우하며 연예인은 더욱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언론의 주장에 그래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단 점, 일단 짚어두련다.

 몰래 그녀 핸드폰에서 번호 알아낸 당신, 전화한다. 그러나 그 남자(여자친구의 옛남자), 당신 전화 받을 일 없다며 단박에 끊어버리고 그 사실을 안 여친 역시 당신을 추궁한다. 당신은 황당하다. 잘못은 지들이 했는데. 이런 상황, 흔하다. 어디서 잘못된 거냐, 당신이 화는 낼 수 있다. 기분, 나쁘니까. 인정.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왜냐. 그녀와 당신의 관계가 그와 무관한 만큼이나, 그들의 관계 역시 당신과 무관하게 그들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그에겐 당신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그의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듯. 그런데 당신은 왜 당연히 개입 권한이 있다고 여긴 거냐. 왜냐. 사랑하니까. 사랑의 권리가 그 정도는 되니까. 그녀와 다른 사람 사이에 나와 별개의 관계는, 사랑한다면, 존재하지 말아야 하니까. 그렇게 믿는 거다. 자신과 별개의 노정이 연인의 삶에 존재할 수 있단 사실을 수용하기 힘든 지금처럼 말이다.
  이런 오판은 왜들 하느냐. 인간들이 그만큼 사랑의 합일성과 완전성을 신화화해온 탓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어떤 '별개'도 존재해선 안 되고,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만유인력에 필적할 무슨 우주적 정당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오해는 풀고 가자.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그저 다른 모두의 감정만큼만, 딱 그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완전하기는커녕 가장 불완전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제발 유난 좀 떨지 말자.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때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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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열의 편곡, 루시드폴의 기타 연주,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네온 주자 고상지, 이 남자가 이렇게 노래를 잘 했나 싶은 이적까지. 목소리 자체가 노래 가사랑 잘 어울리는 최백호씨의 원곡만큼만큼이나 편곡된 노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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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12-18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에 봤는데 댓글을 못남겼네

나는 이적이 노래부르는 걸 본 것중에 이게 제일 근사한 것 같네요
워낙 노래가 좋은 곡이기도 하지만
이번 앨범 노래들 탈탈 털어서 다 비교해봐도 이만한 게 없네요

너무 잘들었어요 덕분에 :)

Arch 2010-12-18 18:48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오랜만이다^^ 잘 들어주면 저도 좋죠~

이 사람 눈을 깜빡 깜빡이는 것도 멋졌어요. 편곡도 참 좋고.

양철나무꾼 2010-12-21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봤는데...소름이 끼쳤었어요~

전 옛날에 '그녀를 잡아요'(?),이 곡도 좋았어요.^^

Arch 2010-12-22 09:30   좋아요 0 | URL
아, 같이 봤구나 우린^^ 노래 참 좋죠~
 

 

 자신이 읽은 책들을 꼭꼭 씹은 후 소화시켜 내놓은 책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 듯 책에만 파묻혀 글을 쓴 게 아니라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노력한 책이다. 한동안 서재에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란 책이 신간 소개로 나오길래 저자의 지난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 책과 세계화로 인한 세계 곳곳의 사정을 기록한 <닥쳐라! 세계화>를 알게 되었다.  

 단어들은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고, 생각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업 노트'를 통해 엄기호씨가 어떻게 공부를 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래 글은 촛불 집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좀 전의 시각과는 다른 면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처럼 공부하고 싶은 것 만큼 말로만 떠드는 연대에서 벗어나 의미있게 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런 미덕을 지닌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는, 셈되지 않던 사람이 “당신들의 셈법이 틀렸다!”라고 폭로하며 셈법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이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가? 그것은 진짜로 이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그리워만 하던” 1987년의 세대가 아니라, 자신이 셈에서 빠졌다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사실을 진짜로 믿으며 그것을 실체화할 것을 요구하는 촛불들 말이다.

 물론 그 촛불들이 늘 성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저항은 실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늘 실패하고 패배한다. 2008년 봄의 촛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촛불에 참여한 사람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배제된 주권자인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함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 존엄함에 대한 감각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은 존엄하지 않다는 인간 중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존엄함에 대한 감각은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넘나든다. 살기 위한 투쟁은 언제나 죽은 자, 죽어 가는 자에 대한 초혼을 반드시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존엄하다면, 죽어 간 존재, 죽어 가고 있는 존재의 존엄함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외국에서 에이즈 감염인들이 벌였던 목숨을 건 투쟁에서 많이 목격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투쟁 역시 촛불처럼 실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목숨을 건 투쟁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며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에이즈 감염인들은 투쟁이 끝나고 난 뒤 흐느끼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존재함을, 이 사회에 내 목소리가 있음을 느꼈다. 나는 늘 목숨만 부지하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알리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 싸움에서 당신들을 통해 나의 존엄함을 얻었다. 약은 못 얻었지만 더 이상 원하는 것은 없다.”

2008년의 촛불이 우리 사회에서 진정 민주주의와 존엄함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 사건이었다면 이것은 쉽게 꺼지지 않을 터이다. 이렇게 한 시대와 존엄함에 대해 공통으로 갖게 된 ‘우리’라는 의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자 현실적 힘으로써 현재와 단절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이들의 강력한 에너지가 될 테니 말이다.

‘우리’의 강력한 에너지는, 촛불을 만든 이들이 “우리가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와, 촛불을 끄려는 이들이 “너희는 아무개이다!”라고 외치는 소리 사이의 적대가 해소되지 않는 한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적대 관계는 근대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 불화이지만, 그 속에서 아무개들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주변의 다른 아무개들에게도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 불화의 핵을 점점 더 포위해 나가리라. 근대가 가진 위험을 과격하게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이 정치의 무덤에서 잠자고 있던 아무개들은 황우석 사건이라는 반동적 급진화를 거쳐, 이렇게 다시 급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힘이 되어 우리 사회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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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고립되지 말고 싸우고 있는‘세계’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이다."라고 얘기하시더군요.

저 또한 마음만 좀 과격해서 말이죠~

Arch 2010-12-14 19:08   좋아요 0 | URL
저는 입만 과격해요. 대안을 참 많이 외치고 다녔는데 결국 엉덩이가 무거워서 눌러앉기 일쑤였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뭔가 도움이, 아니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살아오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말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마이크를 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하죠. 그래서 힘 있는 자는 기자회견을 할 수 있고 그 자리에 마이크가 얼마나 모여드느냐가 사안의 중대성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힘이 없어 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집회고, 그래도 안 되면 추운 날씨에 고공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제가 사회를 볼 때는 대통령이 와도 순서가 아니면 마이크를 넘겨주지 않습니다. 다스릴 사자, 모임 회자입니다. 사회자는 모임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잘 사용해야 하므로 정당한 권리행사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발언권을 주지 않습니다. 제게서 마이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관객뿐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명확히 아는 진실의 범위를 건드리는 말도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사설에 "김제동씨의 유명세가 5년간 올라가면서 제작진과 관계가 부드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인용됐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스타 골든벨> 작가들이 왜 토크 콘서트를 보러 왔겠습니까. 인간관계에 대한 그와 같은 언급은, 적어도 직접 제게 물어보시고 나서야 하셨어야 합니다. <100분 토론>에 나오신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제동씨 때문에 우리도 재보선에서 표 손해 많이 봤다"는 발언을 하셨는데, 행위 주체를 저라고 했으면, 제가 한 행위를 적시하고 나서 그 결과를 말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저의 어떤 행위 때문에 표를 잃었는지를 밝혀야 정상적이죠. 자꾸 색채를 덧씌워가기 시작하면 불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감 중에 "이념적 편향이 눈에 띄는 사람은 제작진이 사회자 고를 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왔고 KBS 사장이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오히려 거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 편향을 띤 것으로 보였다면 그건 제 실수입니다. 다만, 제가 한 어떤 행위에 편향이 있는지 설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헌화하지 않은 사람이 현 정부 인사 중에 있습니까? 공인으로서 의견의 표출에 대해 가져야 할 신중성을 말씀하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표하는 데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제가 믿은 것이 옳지 않다고 검증되면 언제든 사과할 자세도 되어 있습니다.
 진성호 한나라당 의원,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위원 등 이번 일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신 정치인, 언론인들이 한번 토크 콘서트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홍정욱 의원은 성향이 다르고 그 사람을 방송에서 내친다면 촌스런 정권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옹호해주신 건 고맙지만 '촌스럽다'는 단어는 그런 데 붙이면 안됩니다. '촌스러움'을 모독하면 안됩니다. 저는 현 정부가 잘되길 바라는 한 시민으로서, 끊임없이 묻고 풍자할 권리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을 하는 한, 어느 집단이 힘을 쥐건 설령 제가 그 집단에 투표를 했다 하더라도, 이념 성향에 관계없이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겁니다. 제 가장 큰 이념은 웃음이고 그걸 포기하면 저는 끝입니다. 그것을 비판이고 반정부라고 말한다면 죽을 때까지 비판적이고 반정부적일 겁니다.

 <맺는말 중> 2009년 10월 MBC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됐으나 정규 편성되지 못한 <오 마이 텐트>의 조준묵 PD는 MC 김제동의 배려심과 수줍음을 살려, 야외로 나온 게스트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의도를 설명한다. 조 PD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솔깃한 대목이 있었다. 상대가 채식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PD는 김제동의 집 근처 방배동 곱창집으로 첫 만남의 장소를 정했고 김제동은 선선히 응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주인아주머니가 김제동 앞에 된장찌개부터 내놓았을 때에야 조 PD는 그의 사려를 알아차렸다고 했다. 언젠가 <오 마이 텐트>의 제작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MC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그의 성품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중요한 토크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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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10-07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말뿐입니다.
김제동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정권과 추종자들.
한심스러움입니다.
김제동의 정제되고 숙련된 입을 통해
국민에게 웃음주는 사회가 지속되길 응원합니다.

Arch 2010-10-11 21:18   좋아요 0 | URL
저도 응원해요

양철나무꾼 2010-10-0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추천 꾸욱이요~!!!

Arch 2010-10-11 21:18   좋아요 0 | URL
^^

순오기 2010-10-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가들이 오히려 김제동에게 배워야합니다.

Arch 2010-10-11 21:1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이 책도 추천해요^^
 

  여성주의는 제 자신의 경험과 고통에 대해 굉장한 설명력을 준다는 점에서, 그래서 저를 끊임없이 정치적인 인간이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여성의 삶에 근거한 새로운 언어를 고민하는 학문이 여성학이 아닐까.

 안다는 것은 '알게 된 새로운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

 공략하기보다는 우리가 기존의 언어하고 다른 언어나 다른 인식체계, 다른 가치관을 가짐으로써 어떤 면에서 '궤도 밖에서 좀 살아보자'라는 것이 '낙후시켜라'의 논의이다.

 여성과 남성이 원래 임의적인 범주,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범주이기 때문에 같은 성별이라도 내부에 차이가 많은 게 당연하다.

 성폭력- 의무, 역할, 권리, 문화, 일상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범죄가 된 경우. 당신(가해자)이 기억할 수 없는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인권은 주체와 대상(타자)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배려가 아니라 경합하는 가치, 각축하고 투쟁하는 가치이다.

  가족주의는 여성의 노동에 대가를 지급하지 않기 위한 이데올로기.

  거짓말, 참말의 문제는 진실이냐 아니냐, 사실인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의해 구조화된 인식론적 관점의 문제이다. 성폭력 하지 않았다는 사람에게 했다고 '설득'하거나 '강요'하기보다는, 성별권력관계에서 네 행동이 왜 성폭력이란 의미를 갖는지 혹은 갖지 않는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기보다 그들을 욕망하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가부장제이다.

  사회적 강자들은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남성들의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남성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주의와 자기가 보편이란 착각은 지적 능력을 갉아먹는 태도이다.

 콘돔을 착용해서 성욕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용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성욕이 떨어진다고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성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데도 남성은 사회적 존재나 계급적 존재로 여겨지지 성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은 무성적 존재까지도 다 성적인 존재나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

 (O양 비디오 사건) 아마 그렇게 눈물 흘리고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일종의 협상을 한 거겠죠.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두가지 잖아요. 성스러운 어머니가 되거나 피해자가 돼서 울어야 합니다. 여자가 울지 않고 당당하면 굉장히 미워해요. 피해자 연기를 한 걸거에요.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너무 화가 나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 여성을 이해할 수 있지요.

모성은 여성을 특정한 역할 노동에 묶어두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도이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지도 않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모성을 재해석하거나 확대해석하면, 아이들한테 밥 차려주고 공부시키는 것만이 모성이 아니라 엄마가 새로운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도 훌륭한 모성이다. 엄마가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 엄마 스스로 행복한 것이 아이에게도 중요하다.

(투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경향.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 자기가 욕망하고 동일시하고 싶은 정당에 투표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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