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ji님 서재에서 보고 알게 된 10cm, 오늘 한겨레 신문에서 소개가 나왔길래 페이퍼에 올려본다.

 지금 홍대 클럽에서 가장 떠오르는 뮤지션을 묻는다면 '십센치'라고 답하겠다. 멤버 두 사람의 키 차이가 10cm라서 지었다는 이름의 유래처럼 음악은 가볍고 유쾌하며, 밉지 않을 만큼 위악적이다. '혹시나 내가 못된 생각 널 갖기 위한 시꺼먼 마음/의심이 된다면 저 의자에 나를 묶어도 좋아' 라는 개구진 가사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는 라디오에서도 요즘 종종 들린다. 셔츠 깃에는 낭만과 허세를 세우고, 가슴속에는 망사스타킹에 대한 집착을 간직한 건강한 청년들의 노래다. (황선우/<더블유 코리아> 피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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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0407.html

 이 세상에는 몸 둘 곳이 없었을까? 무대 밖으로 영원히 몸을 숨긴 배우의 죽음을 수사한 경찰은, “(음주 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하였다. 이유는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자살 사건의 90% 이상이 비계획적이지만, 그것이 곧 ‘충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충동’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선정적으로 수사(修辭)할 뿐 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가로막는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자살은, 질병의 경과점 혹은 투병의 과정으로서 자살이다. 예전에 어느 신문에서 방한한 외국 가수를, “한때 우울증에 빠져 방황했지만 재기했다”고 소개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에 빠져? “빠져”는 자발적 탐닉이라는 의미로 대개 마약, 알코올, 도박 등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당뇨에 빠져”, “암에 빠져” 이런 말은 없다. 정신적 불편함(mental disease), 흔히 말하는 ‘정신병’은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육체적인’ 질병과 다르지 않다. 우울증은 독감이나 교통사고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정상적인 질병’으로 인구학적 특징이 ‘없다’.

 우울증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누가 진짜 미쳤는지”를 생각하게 할 만큼 대단히 모순적이다. 우울증은 결정권(권력)이 많은 기업의 리더처럼 스트레스와 관련 있다는 인식도 있지만, 반대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사치스런 병이라는 통념 역시 집요하다. 이를테면, ‘일하는 건강한 민중’은 우울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편견의 효과는 단 하나, 아픈데 돈 없는 사람들이 넘어서야 할 정신과 병원의 문턱만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아픈 이가 누구냐에 따라 우울증은 다르게 인식된다. 천재나 예술가의 우울증은 예민한 재능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평범한 사람의 우울증은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나약함으로 간주된다. 감기라는 비유처럼 가벼운 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우울증 병력자나 환자는 비정상, 비이성, 잠재적 폭력범 등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공포가 있다.

 이런 모순된 인식의 배후에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해(利害)관계와 담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양가적 인식들의 공통점은, 우울증에 대한 무지 그리고 이 무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무지를 자신은 그만큼 ‘정상’이라는 증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될 만큼 고통스러운 질병이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의미를 넘어 ‘패가망신’, ‘인생 실패’, ‘참극’ 등 과도한 낙인을 안게 된다. 새삼 지금 한국 사회의 자살사태(沙汰)를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살을 예방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살 권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고, 또 하나는 자살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병행되어야겠지만, 나는 후자가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우울증의 고통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나는 자살에 관한 사회적 대책이 자살을 생명과 대립시키는 ‘자살 방지 캠페인’에서, 우울증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고통이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다른 질병에 비해 위로, 간병받지 못한 병사(病死)일 뿐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통증의 해결이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자살은 ‘생명 경시 풍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생명의 고통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한 개인의 외로운 처방전이다. ‘병사로서의 자살’은 자살에 대해 관대해지자는 주장이 아니라 예방책에 대한 논의이다. 한때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는 병력이 이후 인생의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조금이라도 소통될 수 있다면, 자살은 줄어들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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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어둠을 발라
뭇볕 아래서 몸을 뒤채던 그녀는
사위어가던 욕망을 집어
운명을 피해 보라색 지팡이를 드네

요염스레 손을 벌려
숨어있는 통증을 찾아헤매이네
사각사각 입을 벌려
일그러진 내일을 또 갉아먹네

찬란하게 생긴 그녀는
박제가 된 구원을 낚고
기묘해진 웃음을 지어
앙칼지게 도망가네

a witch's violet wand

숨을 죽인 채 악몽을 발라
내일로 가는 길에 서 있던 그녀는
땅에 떨어진 입술을 주어
주머니에 넣어 보라색 지팡일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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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7-07 0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얘네 너무 좋아용 ㅋㅋ

Arch 2010-07-07 11:50   좋아요 0 | URL
거울이란 노래도 너무 좋아요. 무슨 가사를 저렇게 근사하게 써요
 


 조갑제가 한국 저널리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면 그곳엔 아마도 ‘사실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의 위험에 관한 평가가 올려져야 할 것이다. 또는 개개인의 ‘보는 눈(seeing eye)'의 입장에서 세계를 생각하는 시각주의의 함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과 폴 라자스펠드는 ‘기술적 프로파간다’ 또는 ‘사실의 프로파간다’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토드 기틀린도 대중의 의식이 자질구레한 사실의 물신주의에 의해 압도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지적한 바 있다.

사실 물신주의는 눈 중심의 관찰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관찰자가 주로 어떤 환경에서 활동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략-

믿기지 않겠지만, 조갑제에겐 <월간조선>에 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낼 사람들이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에겐 오직 자신의 행동반경에서만 접촉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갑제가 자신은 늘 사실 중심일 뿐 이데올로기 편향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건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은 조갑제에게 자신에게 가해진 환경적 제약을 뛰어넘어 사실을 볼 마인드와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 편향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건 안타깝긴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 중략-

조갑제는 퇴임 후 인터뷰에선 10년을 더 늘려 80세까지 기자로 뛰겠다며 앞으로도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쓸 생각이라고 밝히면서 야구, 비행기 사고, 고래, 여행 등의 주제를 다룰 생각이라고 말했다. 조갑제가 부디 하루 빨리 야구, 비행기 사고, 고래, 여행 등의 주제에만 전념해주길 바라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한나라당은 보수로 위장한 친좌 정당”이라는 희소성 있는 발언에 열광할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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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5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6-25 11:06   좋아요 0 | URL
ㅋㅋ 그도 한때는 기자로선 최고라고 불렸다는게 의아했어요.
그런데 이 책 보고선 결국 환경이 일정 정도는 누군가의 시각을 제약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0-06-25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정혜신의 '마음'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1521.html

 후론은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 사고구조가 단순한 게 아닐까 되짚어보기보다 배후라는 외부 환경을 손쉽게 앞세우는 행위이다. 석가모니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일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가지 과장된 정보 때문에 잠깐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것은 온전히 ‘주체적 나’의 판단이었다. 당시 그 많은 촛불이 거리를 뒤덮었던 것은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한 구체적 사실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극소수 정책결정권자들이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이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먼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겨레의 새로운 칼럼 필진으로 참여한 정혜신씨의 '마음'이란 코너에서 너무 당연한데 지켜지지 않은 상식적인 이야기가 맘을 건드렸다. 강경하거나 뭔가에 호소하는 듯한 얘기가 아니라 차분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글쓰기가 참 부럽다. 앞으로 그녀의 칼럼이 기대된다. 정혜신씨의 저작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내 기억으론 이 분을 마태우스님의 서재에서 보고 그 뒤로 쭉 이 분 책을 읽었던 것 같다. 



 * 강준만의 '더러운 철학'

http://www.hani.co.kr/arti/SERIES/189/408639.html 

 한국의 논객들은 대부분 편이 갈라져 있다. ‘보수에 대한 비판’ 아니면 ‘진보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보수가 보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찰하거나 진보가 진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찰하는 일은 드물다. 보수·진보의 구분을 떠나 어느 쪽에서건 ‘상식’이나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에 대해 의심해볼 것을 요구하는 일도 드물다.

 
김진석씨의 '더러운 철학'은 기우뚱한 균형보다 별로였지만-앞부분의 철학 얘기가 좀 늘어졌다. 물론 뒷부분은 흥미로웠다.- 강준만 선생님의 칼럼을 통한 문제의식만큼은 공감했다. 강준만 선생님의 칼럼이 점점 인물과 사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초반의 활기를 잃어가는 느낌이지만 여전히 그가 하는 질문들은 과거와 지금에 유의미하다.






* 남재일의 '보수의 문법'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4139.html

  보수주의 정치담론의 전략은 공유가치
의 선점을 통해 정당한 이의제기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상 보수주의자의 프레임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조지 레이코프의 말처럼 보수주의자의 프레임에 대항하거나 그 안에서 놀아날 때 반대 진영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왜 그런지를 남재일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

 그의 저작을 내가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고독하지만 즐거운 방향과 편애함을 드러내는 우아한 제스처를 배울 수 있었다.



* 그리고 이 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3776.html

 아이가 자기의 아이인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론적 불안에 휩싸이는 남자들이 터치에 위로받는다는-그럼 가사 분담과 자녀 양육을 통해서 터치를 하세요라고 퉁이라도 먹이고 싶은- 이 글의 취지도 어처구니 없지만, 그래서 룸쌀롱에 간다고 결론을 내리며 자화자찬하는 꼴은 더 웃겼다. 철 없는 남자론은 부조리하고 관성적인 것들을 모조리 '남자들은 철이 없어서'로 일관한다. 불편하고, 자기 좋을 때만 철이 없어서 불쾌했다. 한겨레측에 조목조목 반박문을 실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차혜령씨가 '아무나 만지지 마라'는 글을 써주셨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424204.html

 멋지다!

 예전에 고대 나온 남자에 대한 칼럼을 읽고서 불편했는데 그 주에 독자 칼럼에 어느 분이 반박글을 보내주고.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410710.html
 
 그 신문에 그 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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