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자대표 회의인데 다들 회의장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회의가 얼른 끝나길, 질문하는 사람 저 세상 사람이란 무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질문하고 따져 물었다. 대의제로 선출된 게 아니고 할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맡은 역할이지만 회의비만 축낼 수는 없었다. 내가 바꾸거나 잘할 수 있는 영역은 손톱보다 작았지만 질문으로 운영 전반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급하게 내리꽂는 시선에 더 묻지 못하고 황급히 회의를 끝냈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갔다. 집에 갈까, 싶었는데 불편해도 있고 싶었다. 입주단체대표의 개인사와 건강상태까지 시시콜콜하게 다 들었다. 대표가 시덥지 않은 일을 과장해서 마치 엄청난 활동처럼 부풀리길래 나도 그런 일 해봤다라고 말했다. 어떤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현했는지 간략하게 말을 했다. 다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말의 말미를 끝마치지 못하고 헤매는데 일한지 얼마 안 된 관리소장이 웃음을 머금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옴마야, 심장아 나대지마라.

 

권한은 작은데 주변경계는 커져가서 자칫하면 내 바운더리가 아작나게 생겼다.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 일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적성에 맞는 이 일을 매년 같은 루틴으로 반복하자니 지루해 미치겠다. 전망은 보이지 않고 근근히 월급쟁이로밖에 살 날만 남은 느낌이다. 앞서 말한 아이디어는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뻔한걸 뻔한 방식으로 재탕하고 싶지 않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게는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는 일. 그런데 상대방이 그 맘을 읽은 것처럼, 내 맘을 다 헤아린 것처럼 웃는다.

 

익숙하고 지리멸렬한 관계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다. 새롭게 나를 자리매김할 수 있는 관계,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의 사소함에 집중하고 미묘한 차이에 감동을 받았다지만 단번에 바꿀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선 아니었을까. 노회한 전 관리소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세상물정 모른단 식이었는데 이 사람은 1년차란다. 집이 이런데 괜찮은지 물었더니 시간 날 때 언제든 연락주면 가서 봐주겠다고 한다. ! 나는, 누군가 부탁하면 흔쾌하고 호의적으로 반응했던가. ‘왜 그것도 몰라, 언제까지 알려줘야 돼였나. 처음의 내가 일을 낭만적으로 보고 호기롭게 도전했던가. 모든 게 설어서 우왕좌왕하고 배우려고 애썼던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를 떠올려 본다. 관리소장의 미소는 처음 내가 가진 갈망을, 맘가짐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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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날이었다.

나는 일이 끝나면 쉬고 싶은데 아이를 본다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주에는 무엇을 해도 아이는 금세 바닥에 누워 뒹굴 것처럼 화나 있었다.

아이고 뭐고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기 싫은 마음에서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아이를 안 보고 싶다는 감정.

힘을 내서 아이 기분을 맞춰주다 제풀에 지쳐 다시 사이가 틀어지고.

나는 우리 아빠처럼 아이를 대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할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피곤함은 가실줄 모르니 고민은 공염불에 그치는 날이었다.

상냥함과 화의 반복, 설득과 으름장의 교차, 열정과 자포자기의 시간

 

주위에선 그 나이 아이는 다 그렇다고, 고집을 부릴 때라고 한다.

나도 그게 맞다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건 다르다.

몸이 힘드니까 아이를 받아줄 맘의 공간이 터무니없이 좁아졌다.

사소하게 화내고 끊임없이 자책했다.

 

 금요일엔 이 모든게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아, 지겨워. 왜 이토록 지겨움을 가득 짊어지고 지친채로 살아야할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맥주를 먹기 시작했다.

밥을 안 먹겠다는 아이를 설득하고 사정해가며 밥을 주는 대신 아이가 먹고 싶은걸 줬다.

아이가 하고 싶다는 생일축하 놀이도 다 하고 웬만한 일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나는 취했고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는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그 모습들을 가감없이 내보였다. 사랑스럽고 상냥한, 다정하고 멋진 모습들.

아이 안에서 계속 갖고 있지만 꺼내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애틋하고 따스한 마음이 피어났다.

나는 단박에 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 감정이 다시 되살아난다.

아이의 부정확한 발음과 동작, 표정이 죄다 사랑스럽다.

 

 내가 아무리 고민을 해도 풀어지지 않던게 어떻게 이렇게 한번에 변한걸까?

적정한 선과 적당함을 지키려는 방식이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느낌을 준 걸까?

일과를 마친 아이는 그토록 치열하게 다툼했던 양치질도 쉽게 끝내고 잠도 편안하게 잘 잔다.

 

 성공?의 경험을 한 나는 노심초사하며 아이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이제는 많이 사랑을 표현하고 아이랑 있는게 지금 나한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인지를 말한다.

신경이 곤두서서 조금만 자기 의사에 반하면 드러누으려고 했던 아이는 내 얘기를 순순히 들어주고 타협을 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 안에는 이미 좋은 심성이 있었다.

나는 그 마음들이 나와서 스스로를 보듬어주는걸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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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가 아침을 먹으며 ‘포크포크’를 외친다. 누구꺼 있잖아. 그래도 포크포크. 아이의 다양하고 급변하는 요구를 들어주다가 이제 그만을 외치고 싶을 때면 스스로 묻는다. 이 요구는 안전한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건가. 아니야. 포크를 꺼내서 줬더니 아기는 아빠한테 포크를 준다.

- 아빠 먹고 가. 이거이거

하며 사과를 집어준다. 아기 아빠는 전날 과음해서 속이 안 좋을텐데 이거 어쩌진 아니고 그것 참 쌤통이다 싶은 마음. 음하하

 

* 한밤중 칭얼거림. 달래고 토닥여 재워야하는데 내가 피곤하다. 아가야 자, 자야지 내일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지. 그래도 칭얼. 왜. 왜? 왜! 내 목소리를 따라 아기의 칭얼거림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더니 이내 울음소리가 나고 나는 잠이 깨버렸다. 잠이 깨서 화가 나고 화를 아이한테 쏟고. 악순환이다. 연결고리를 누군가 끊어줘야하는데 대부분 a가 그 역할을 한다. a는 아이의 불편함을 들어주려 애쓰고 귀 기울인다. 나는 옆에서 날아간 잠을 불러들이며 왜 육아 이론은 내가 더 잘 아는데 a가 아기를 더 잘 보는걸까란, 당연히 이론보다 실제 맘이 더 중요한 이유를 갖고 괜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아이는 한밤중에 쉬를 싸고 싶어 칭얼거린거였다. 나도 아무 이유 없이 맘이 그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수용해주는 부모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나에게 말했었는데 망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밤중에 언성을 높여 미안한 맘에

- 누구야. 엄마가 어제 자는데 큰소리 내서 정말 미안해.

라고 했더니

- 엄마, 나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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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그동안 아기는 울고 웃는 표정 밖에 짓지 않았다. 단순하고 투명한 욕구가 바로 얼굴에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이랑 놀거야’는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그런데 엄마는 같이 못 가. 안 가.’이러면 입을 삐쭉 내밀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우는 게 아니라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얘기한다.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니까 처음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다 두 번째에는 살짝 고민하더니 씽긋 웃어버린다. 엄마가 장난치는걸 알아버린거다.

 

아기의 감정이 다양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용은 선명하다. 감정을 숨길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바닥에 뒹굴고 기분이 좋으면 원숭이처럼 킥킥거린다. 웃음소리가 커졌고 감정의 폭이 넓어졌다.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들여다볼줄 아는 아기로 자랐으면 좋겠다.

 

한계

 

  아기가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한계 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전부터 안전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영역에서는 경계를 정하고 그 외에는 자율적으로 지내도록 했는데 최근 식사와 잠자리 습관을 들이면서 어느 선의 한계가 적당한지 고민을 했다. 특히 감기 기운으로 입맛이 떨어졌을 때는 정말 헷갈렸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장난을 친다. 밥을 뱉고 수저로 식탁을 친다. 일어나는 건 안전에 관한거니까 제재했지만 밥을 뱉는 건? 밥을 잘 안 먹는 건? 밥을 먹는 시간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다 먹지 않으면 그릇을 치우는 방법으로 써보았다. 처음에는 계속 배고프다고 칭얼대거나 여전히 장난을 쳤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앉은 자리에서 밥을 잘 먹는다.

 

 그 다음에 잠자리. 앞에 썼지만 그동안 잘 때 아기 스스로 자지 못하는걸 감안해서 자는데 도움이 되는 건 다 수용한 편이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엉덩이를 두드렸다 어부바를 했다, 책을 읽다 노래를 불렀다, 물을 가져오는 것 등등. 그런데 내가 아기라면 굉장히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어떤 욕구든 한계 없이 다 들어주는게 과연 좋은걸까. 오히려 한계 없는 욕구가 아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한밤중에 악을 쓰면서 우는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잘 때는 자기 잠자리에서 잔다’ 외에는 다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양한 요구를 하다가 며칠 지나니 편하게 잠이 든다.

 

 a는 이러한 육아방식이 아기의 기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안 돼’란 말을 남용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걸 생각하기 전에 엄마 눈치를 볼거라고 한다. 아기가 눈치를 볼 정도로 ‘안 돼’의 영향력이 센 걸까. 자신의 행동이 어느 선까지 수용되는지 확인하고 그 경계를 인정하는게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정말이지 육아는 답이 없다. 나 역시 아기와의 관계로 서로의 한계와 접점을 찾아가며 맞춰가는 수 밖에 없다.

 

넛지

 

 넛지는 ‘주위를 환기시킨다’는 영어로 강압하지 않고 부드러운 개입으로 사람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뜻한다. 밥을 먹고 이를 닦는다거나 제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활동을 아기 스스로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아기가 어렸을 때는 내가 직접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수월하게 했다. 하지만 걷기 시작하고 자유의지가 생긴데다 장난치고 싶은 꾸러기가 숨겨져 있는 20개월에는 모든 것을 설득해야한다.

 

 기저귀를 갈자고 하면 도망을 간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관심 없던 자동차를 탄다고 한다. 밥을 먹으랬더니 뱉고 자랬더니 물을 먹는다, 나갔다온다, 어부바를 하겠다 난리난리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가 차라리 낫다. 바르지 않은 행동은 감정을 읽어준 다음 제지를 하면 된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안 할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이고 이를 닦이고 옷을 입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고안한 게 바로 넛지.

 

 기저귀를 갈아야하는데 벌써 눈치 채고 저만치 도망가는 아기. 쫓아가서 데려올 수 있지만아기가 스스로 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넛지를 시도해보았다. 동물들과 대화를 한다거나 비닐 소리를 내면서 먹는 시늉을 하는거였다. 처음 몇 번 아기는 호기심에 내 옆으로 와서 슬쩍 본다. 하지만 비슷한 수법이 반복되자 아기는 동물이랑 얘기하며 먹는 소리를 내는 내게 토끼 인형을 던져주고 갔다. 시늉을 할거면 인형이라도 데리고 하라는건가. 넛지 실패. 넛지는 처음 몇 번 반짝이는 아이디어 수준이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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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a보다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 놀러갔다. 이제 막 뒤집기를 시작하고 앉을 줄 아는 어린 동생 b는 a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a를 데리고 다니면 자식을 다 키운 분들이 아기를 어떻게 키운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나 역시 a가 저만할 때가 불과 1년 전인데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아기 사이에서 1년은 엄청 큰 차이인지 b는 이내 a가 내는 소리와 움직임에 심기가 불편해졌나보다. 우는 일이 별로 없다는데 계속 칭얼댔다. a는 a대로 놀만한거리가 없으니까 심심해했다.

 

 나와의 관계, a 또래와의 관계에서 a는 똑똑하거나 야무지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웬일인지 b랑 있으니 a의 문제 행동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괜히 누워있는 b의 머리카락을 밟는다거나 손으로 눈을 찌르고 아, 예쁘다 하는 척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간만에 다른 아리 엄마 집에 놀러왔는데 좌불안석이었다. b의 엄마가 b가 왜 우는지 살피기보다는 조금만 우는 시늉을 보여도 바로 안는 통에 a는 아무 짓을 안 해도 좀 뻘쭘해지기 시작했다.

 

 a가 또래랑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동생이라 그런건가.

 

 b의 엄마가 a에게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a 딴에는 자신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다고 느꼈나보다. 자신의 존재를 밀쳐내는 동생과 어른,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엄마 사이에서 a가 선택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 중 하나가 동생을 자극하는거였을까. 그런 것까지 생각한건 아니고 a의 자연스러운 소리와 움직임이 b에게 낯선 것 뿐이었을까.

 

 얼마 전부터 아기는 어린이집을 다닌다. 적응 기간 동안 아기랑 어린이집에 앉아 있는데 가끔 지나가는 말처럼 선생님이 그런다.

- 누구가 어머니한테 자꾸 안기는건 일찍 엄마랑 떨어져서 그래요.

- 어머니도 알겠지만 누구가 발달이 좀 늦어요.

 

 아기를 이 선생님한테 맡겨도 되는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선생님 말로는 a가 애착 형성이 잘 돼서 어린이집 적응을 잘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되는걸까. 선생님이 귀뜸한 아기들은 사랑스럽고 순진하다. 일부러 자세히 봐서 선생님이 얘기한 지점을 확인하려 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다른 아이들도 정도만 다를 뿐 다 갖고 있는 특징이다. 별 일 아닌데 소란스러워지면 선생님은 특정한 아기한테 이유를 묻고 아기의 감정과 별개로 타이르거나 훈육을 했다. 며칠 봤는데 그랬다.

 

 그래도 아기는 적응을 잘한다니 괜찮지 않을까란 맘 이면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자리잡았다. 정상에서 탈락하면 어쩌나란 염려. 나 역시 정상 혹은 일반에서 멀었는데 되물림 되는건 아닐까란 걱정.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a가 아무리 잘해도 한번 눈 밖에 난다면 어떡하지. 이 선생님은 아기들의 다른 여건을 포용하기 보다는 규제할 것 같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기를 계속 어린이집에 보냈다. 시간이 지나 선생님과 얘기하며 내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는걸 알게 됐다. 선생님이 조금 다른 아이들한테 유난스럽게 구는 건 아니었다. 인권 어쩌고, 내가 과민했다. 아니아니, 말 몇마디로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에 어린이집 선생님의 업무량과 기대치, 근무조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나랑 떨어져 어린이집 차를 탈 때마다 눈물바다가 된다. 씩씩하고 개구지고 엉뚱한 아이가 어느 순간 감정이 복받쳐 앙하고 울어버린다. 고집을 부리는, 엉성하게 우는 흉내 내는 것도 아닌 울음. 아기에게 슬픔이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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